[이슈프리즘] '트럼프 똥 볼'의 반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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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프리즘] '트럼프 똥 볼'의 반면교사

깡통 걷어차며 걷기’(kicking the can down the road). 미국 정치권을 묘사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반드시 해결해야 하지만 정치적으로 인기 없는 과제를 기약 없이 뒤로 미루는 것을 뜻한다. 매년 연방정부의 부채 한도를 상향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느라 홍역을 치르면서도 정작 재정적자 감축엔 뒷전인 모습이 대표적이다.

더 이상 깡통을 걷어차지 않기로 결심한 건 도널드 트럼프다. 고질적 쌍둥이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수십 년간 지속된 재정적자 탓에 미국 국가 부채는 감당 가능한 수준을 넘어섰다. 못지않게 오래된 무역적자는 강(强)달러에 따른 수출 경쟁력 악화, 제조업 일자리 감소로 이어졌다. 트럼프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중 하나가 동맹까지 내동댕이친 초유의 상호관세다. 연간 수천억달러 관세를 거둬들여 재정적자를 줄이고, 미국에 공장을 짓도록 유도해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시장의 평가는 참혹하다. 트럼프가 깡통 대신 ‘똥볼’을 찼다는 게 중론이다. 그가 포문을 연 무역전쟁에 세계 경제는 그로기 상태다. 미국 경제도 침체를 면치 못할 것이란 전망이 쏟아진다. 인플레이션으로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고, 미국 중앙은행(Fed)은 금리를 내리고 싶어도 내리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 것이라는 우려다. 원하는 만큼 설비 투자가 늘어날지도 미지수다. 대공황급 침체 공포에 뉴욕증시에서만 수조달러의 시가총액이 증발했고, 미국 전역에서 ‘손을 떼라’(hands off)는 반(反)트럼프 시위가 번지고 있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요지부동이다. 확신범도 이런 확신범이 없다. 협상 상대국에 관세 인하의 대가로 미국 영구채 매입을 요구하자는 스티브 미란의 ‘마러라고 합의’ 구상을 실행으로 옮길 수도 있겠다는 섬뜩한 예감이 들 정도다. 어쨌든 미국은 리처드 닉슨의 금태환제 폐지 이후 가장 큰 시스템 변화를 도모하고 있다.

문제는 대한민국은 아무 대책이 없다는 거다. 경제의 90%를 무역에 의존하는 한국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게 자명하지만, 비상계엄으로 시작된 리더십 진공은 아직 60일이나 남았다. 새 정권이 들어온다고 당장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한국은 탈세계화에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쌍둥이 적자만큼 구조적인 문제를 수십 년째 방치한 탓이다.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높여 제조업 수출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지 20년이 훌쩍 지났다. 진통 끝에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 2011년 발의됐지만, 올해로 15년째 국회에 계류 중이다. 고용의 80%를 차지하는 서비스업 종사자의 1인당 생산성은 제조업의 절반에 불과하고, 서비스 수지는 작년까지 24년째 적자다.

그사이 제조업도 경쟁력을 잃고 있다. 고부가가치 위주로 산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해야 한다는 얘기도 20~30년 전에 나왔다. 기술 혁신으로만 가능한 일이지만 연구개발(R&D) 인력이 칼퇴근하는 나라에선 언감생심이다. 혁신을 위한 자본 싸움에서도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방치한 탓에 기업 자본조달 비용이 치솟아서다.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경제보다 정치 논리에 가깝다. 세계적 경제학자가 즐비한 나라에서 족보도 없는 포퓰리즘이 득세한 이유는 결국 엘리트 정치인들이 숙제를 미룬 대가다. 한국도 외부로부터 개혁을 강요받은 외환위기 이후 한 번도 제대로 개혁을 한 적이 없다. 그 대가는 거대 시장과 기축통화를 보유한 미국과는 비교도 안 되게 혹독할 것이다. 이번 위기를 구조개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트럼프는 똥볼이라도 찼지만, 우리에겐 똥볼을 찰 여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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