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 유엔총회 참석 前 밝혀
“트럼프·김정은 합의한다면
北핵무기 생산 동결에 동의”
핵동결론 꺼내 대화 판흔들기
한미일 외교장관, 북핵 논의
김정은, 최고인민회의서 연설
트럼프에는 “좋은 추억”
핵보유국 지위 굳히기 주력
판문점 깜짝회동 성사 노리나
한반도를 둘러싼 신냉전 구도가 가속화하는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이 북핵 문제와 관련해 22일 ‘선(先)핵동결·후(後)비핵화’ 카드를 꺼내며 돌파구 마련에 나섰다.
이 대통령이 이번주 미국 뉴욕 유엔 총회와 다음달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로 이어지는 다자 외교 무대에서 남북, 미·북 대화 재개를 의제로 올리기 위해 외교적 승부수를 던졌다는 평가다. 특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전날 최고인민회의에서 ‘비핵화’를 뺀 미·북 대화에 나설 뜻을 밝힌 연설 내용도 때마침 공개됐다.
이 대통령은 영국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하는 대신 당분간 핵무기 생산을 중단하는 내용으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합의할 경우, 이를 수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북한이 매년 핵무기 15~20기를 추가로 생산하고 있다며 핵동결이 ‘임시적인 비상조치’로서 “실현 가능하고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
이는 새 정부의 북핵 대응책인 ‘중단(동결)→축소→폐기’의 3단계 비핵화론에 입각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우선 북한의 핵능력 확장을 멈춰 세우고 기존 핵무기를 줄인 다음 최종적으로는 비핵화를 이루겠다는 논리다.
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북한과 국제사회가 실질적 비핵화 조치와 대북 제재 완화를 단계별로 동시 교환하되 북측이 약속을 어기면 제재를 복원하는 ‘스냅 백(조건부 제재 완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이 대통령은 인터뷰에서 “비핵화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결실 없는 노력을 고집할 것인지, 아니면 더 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중 일부라도 달성할 것인지의 문제”라는 논리를 펼쳤다.
일각에서는 얽히고설킨 북핵 문제 속성상 북한의 핵활동 중단이 감축과 비핵화로 이어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과거와 달리 ‘불가역적 핵보유국’임을 자임하는 북한이 비핵화를 전제로 한 협상 자체를 거부할 공산도 크다.
전직 안보부처 고위 당국자는 “북한은 과거에도 실질적 비핵화 조치에 필수적인 신고와 검증 같은 ‘진실의 순간’에 항상 판을 깨뜨려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몰고 갔다”고 설명했다.
북한은 유엔 총회와 경주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미·중 정상회담, 노동당 창건 80주년 등 빅 이벤트에 앞서 북·중·러 반미(反美) 연대로 강화된 전략적 입지를 활용해 핵보유국 지위 굳히기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동시에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적 친분을 부각시키며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으로 강화된 한미 관계의 틈을 벌리고, 미·북 정상 간 깜짝 만남 등 외교 이벤트를 노리려는 속내도 보였다.
김 위원장은 이번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과의 우호적 관계를 직접 언급하며 트럼프 대통령과 톱다운 방식으로 대화 재개에 나설 뜻도 드러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2기 들어 북한을 여러 차례 ‘핵보유국(nuclear power)’으로 지칭하며 미·북 대화 재개에 대한 희망을 밝힌 데 일정 부분 화답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이와 관련해 정부 당국자는 김 위원장의 연설 내용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판문점에서 만나자’는 제안을 내포한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를 밝혔다.
2019년 당시처럼 판문점 미·북 정상회동이 성사된다면 국제사회의 이목이 이 대통령이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아니라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에게 쏠리는 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는 ‘피스메이커’를 자처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기질을 고려했을 때에도 가능성이 큰 그림이기도 하다.
임을출 경남대 교수는 “연설에 담긴 김 위원장의 대미 메시지는 트럼프 대통령을 타깃으로 삼아 미국의 정책 변화를 유도하려는 의도”라며 “이는 트럼프의 자존심과 ‘딜메이커(해결사)’ 이미지를 자극해 (핵보유 인정 등) 빅딜 가능성을 떠보려는 것일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한편 김 위원장은 1만8000여 자에 이르는 이번 연설 가운데 절반을 비핵화 불가론과 대미·대남 관계 입장 발표에 할애해 국제사회를 위한 핵보유국 인정 투쟁에 나섰다.
김 위원장은 한미, 한·미·일 군사협력을 북한에 대한 최고 수준의 적대적 행위로 규정하며 핵무장의 불가피성을 강변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 그들(한미)가 ‘단계적 비핵화’라는 개념을 들고나왔는데, 이로써 그들은 우리와 마주 앉을 수 있는 명분과 기초를 제 손으로 허물어버렸다”고 비판했다. 어떤 식으로든 비핵화를 전제로 한 대화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셈이다.
그는 이미 핵보유가 사회주의 헌법에 명문화된 점을 강조하며 “이제 ‘비핵화’를 하라는 것은 우리(북한)더러 위헌 행위를 하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위원장은 연설을 통해 “시간은 우리 편에 있다”는 언급도 했다. 미국과 국제사회를 향해 ‘우리를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든지, 더욱 커지는 우리의 핵능력을 지켜보든지 선택하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이 연설을 통해 제재 완화를 위한 거래, 협상은 영원히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면서 “비핵화와 제재 해제 등 보상을 교환하는 구도의 협상도 원천 거부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홍 연구위원은 “북한은 무엇을 주고받는 협상보다는 핵보유국으로서 대등한 대화, 관계 개선 구도로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