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체불한 사업주 "정부에 청구해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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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의정부 A제조업체에서 5년간 일한 B씨는 지난해 임금을 받지 못했다. A사 사장은 직원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아는 노무사를 소개하더니 “정부에 대지급금을 청구해 임금을 받으라”고 부추겼다. 사장이 소개해 준 노무사는 대지급금 신청 절차를 처리해주고 정부에서 받은 임금의 10%를 수수료로 떼갔다. B씨는 “사장이 체불 임금을 변제하는 노력 없이 정부 대지급금을 주머니 쌈짓돈처럼 여기더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임금체불한 사업주 "정부에 청구해 받아라"

경기 악화로 임금 체불이 급증하면서 사업주의 도덕적 해이가 심화하고 있지만 정부는 되레 대지급금 규모와 상한액을 대폭 인상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대지급금이란 정부가 임금 체불 근로자의 밀린 임금을 대신 주고 나중에 사업주로부터 돌려받는 제도다. 고용노동부는 최종 3개월분 임금을 보장하는 대지급금의 지급 범위를 최대 3년치까지 확대하는 내용을 담은 ‘대지급금 제도 개선을 위한 정책연구’ 용역을 발주했다. 2100만원인 상한액을 인상하는 방안도 함께 다룬다.

국내 임금 체불 규모는 건설 경기 악화와 맞물려 2023년부터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2조448억원으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체불 피해 근로자는 28만3000명에 달했다. 이에 대지급금 지출 규모도 2022년 5368억원에서 지난해 7242억원으로 2년 만에 약 1900억원 증가했다. 하지만 체불액 증가 속도가 훨씬 빠르다 보니 전체 체불액 중 정부가 대지급금으로 갚아준 ‘청산율’은 2023년 39.5%에서 지난해 35.4%로 떨어졌다. 이에 노동계와 야당 등을 중심으로 대지급금 지급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고용부가 검토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대지급금 지급 규모를 늘리면 사업주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겨 오히려 임금 체불을 조장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고용부 관계자는 20일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임금 일부를 주지 않고 대지급금으로 받아 가라고 버티거나, 노사가 짜고 허위 계약서를 작성해 임금을 받아 가는 등 부정 수급 사례가 급증했다”고 말했다. 취약 근로자 보호 차원에서 2021년부터 근로감독관의 확인서만으로 대지급금을 내주는 간이 대지급금 제도가 도입되면서 이런 현상은 더 심해졌다.

대지급금의 재원인 임금채권보장기금은 고갈 위기에 처했다. 기금은 사업주의 부담금(보수총액의 0.06%), 사업주의 변제금, 기금 운용 수익금 등으로 조성되는데, 적립금이 2022년 말 6172억원에서 지난해 말 3240억원으로 2년 만에 절반 수준으로 급감했다.

국가가 체불 사업주로부터 받아내는 회수율은 2020년 32.8%에서 지난해 30%로 감소하는 추세다. 이처럼 지출은 늘었는데 수입은 줄면서 기금이 고갈 위기에 처하자 정부는 지난 18일 국무회의를 열어 대지급금 추가경정예산으로 819억원을 편성했다. 고용부 소관 전체 추경액의 39%를 차지한다.

기금 안정화와 임금 체불 방지에 대한 근본적 대책 없이 대지급금 지출만 늘릴 경우 사업주의 밀린 임금을 혈세로 충당한다는 비판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정부는 체불이 많은 산업군이나 대지급금 수령 비율이 높은 사업장에 높은 요율(부담금)을 적용하는 방안을 함께 검토한다. 한 공인노무사는 “회수율 상승을 담보하지 못하고 요율만 찔끔 올린다고 상황이 개선될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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