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장리(長利)업자, 못 받을 거 감수하고 아낀 쌀 빌려주는 사람”
올해 만 93세 나이로 별세한 강신항이라는 국문학자가 있다. 서울대에서 학위를 따고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로 평생을 재직했다. 이 사람이 쓴 책 가운데 ‘어느 국어학도의 젊은 날’(1995)이 있다. 소설이나 수필은 아니고, 본인이 젊었을 때 쓴 일기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6·25전쟁이 마무리되던 1952년까지 쓴 일기 모음집이다. 강신항은 1930년생으로 당시 15~22세 정도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서울대생으로 서울에 거주했지만, 서울대 입학 전과 피란 시기에는 고향인 충남 아산에서 살았다. 해방 후 혼란기와 6·25전쟁 당시 지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장리 주는 사람 또한 비참하다”
이 책에는 돈과 관련해 특히 눈길을 끄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1948년 8월 16일 일기다.
“작년과 금년의 보리농사 흉년, 공출의 가혹, 이로 말미암아 유월부터 굶기가 일쑤, 아아 할 수 없다. 장리(長利)나 얻어 임시 지내자. 즉 지금 보리 한 가마 얻어다 먹고 가을에 쌀 한 가마 주는 것이다. 또 지금 2000원 차금하고 가을에 쌀 소 오두(小五斗). 이 어찌 비참한 현상이 아닌가.”한국에는 1960년대까지 보릿고개가 있었다. 가을에 수확한 쌀만으로 이듬해 쌀을 수확할 때까지 버티긴 힘들다. 특히 봄에 보리를 수확하기 전쯤에는 먹을 게 없는데, 그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했다. 1947~1948년에는 보리농사가 흉작이어서 농촌에 먹을거리가 더 부족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리(長利)를 얻었다. 장리는 곡식을 높은 이자율로 빌리는 것을 말한다. 강신항의 마을에서는 보리 한 가마를 빌리면 가을에 쌀 한 가마를 갚았다. 지금은 보리를 잘 심지 않고, 또 보리가 건강식으로 자리 잡아 쌀보다 보리가 더 비싸다. 하지만 당시에는 쌀이 보리보다 30%가량 비쌌다. 6월에 보리를 빌려 10월에 쌀로 갚는데, 30% 이자를 주는 것이니 1년을 기준으로 하면 100%, 즉 2배 넘는 이자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자율이 높아도 농민들은 지금 당장 먹을거리가 없어 장리를 얻어야만 했다. 쌀이 남아도는 사람은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장신항의 일기에 적힌 다음 구절이다.
“소위 장리 주는 자들은 또한 비참타. 가을부터 애끼고 애껴 모아온, 남겨온 식량을 지금 굶주리는 자의 애걸로 하는 수 없이 자기가 조금 덜 먹을 작정으로 내주는 것이다.” 쌀을 빌려주는 사람은 높은 이자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강신항은 그렇게 쌀을 빌려주는 사람도 비참하다고 말한다. 이때까지 쌀이 있는 사람은 다음 수확기까지 먹고살 수 있도록 계속 쌀을 아껴온 이들이다. 지주는 쌀이 많지 않느냐고 하지만 흉년이 나면 지주도 흉년이고, 먹을거리가 부족하다. 또 이듬해에도 흉년이면 제아무리 지주라 해도 먹을 쌀이 없다. 그래서 아끼고 아껴서 그때까지 쌀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먹을거리가 떨어진 사람들이 와서 쌀을 빌려달라고 한다. 지금은 쌀이 있지만, 쌀을 주면 나중에 자신이 굶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쌀을 빌려주지 않으면 지금 당장 이웃이 굶어 죽는다. 높은 이자를 줄 테니 빌려달라 애걸하고, 그래서 자기 먹거리를 줄이면서까지 이웃에게 빌려주는 것이다.
1년에 100% 이자를 받는 고리대금업자는 나쁜 사람이다. 상대방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한몫 챙기려는 이들이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장리 주는 사람 또한 비참하다” “자기가 조금 덜 먹을 작정으로 내주는 것”이라고 하면 그들의 고리대금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물론 상대방의 어려움을 기회 삼아 큰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강신항도 일기 뒷머리에 이런 글을 붙였다. “물론 (장리 주는 사람들) 그중에는 악질도 있으렷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농촌 장리업자는 자기도 굶주릴 수 있지만 빌려주는 사람, 자기가 좀 덜 먹더라도 빌려주는 사람, 또 흉년이 오면 빌려준 것을 받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빌려주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한 고리대금업자가 고리대금을 나쁘게 보는 사회 인식에 대해 항변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보통 사람은 고리대금업자를 찾지 않는다. 은행에서 빌리고,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에서 빌리고, 친구나 친척한테 빌린다. 그런데 주변의 어느 누구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사람들이 고리대금업자를 찾는다. 돈 빌려주는 데가 이곳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리대금업자는 이런 사람들이 돈을 빌릴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고리대금 이자가 터무니없이 높다고 비난하지만, 이자가 높은 이유는 그만큼 돈을 갚지 않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떼이는 돈이 많아 그 돈을 메우려면 높은 이자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 높은 이자가 전부 수익으로 연결된다면 재벌이나 기업 등 너도나도 고리대금업을 하려 들 것이다. 실제로 수익률이 높지 않다 보니 더 많은 사람이 고리대금업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저런 반론이 고개를 들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공감할 수 있었다. 주변에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고리대금업자를 찾지 않는다. 주변 사람 어느 누구도 돈을 빌려주지 않기 때문에 고리대금업자를 찾는다. 돈을 빌려주지 않는 건 주변 사람의 문제일 수 있고, 돈을 빌리는 본인이 워낙 신용을 잃어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아무도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간다.생전 처음 보는 이에게 돈 빌려주는데…
고리대금업자 입장에서 보자. 고리대금업자는 생전 처음 보는 이에게 돈을 빌려준다. 주변 사람들에게 신용을 잃어 돈을 구하지 못하는 이에게 돈을 빌려준다. 돈을 갚지 못할 가능성이 큰데도 돈을 빌려준다. 우리는 친한 사람이 돈을 빌려달라고 해도 빌려주지 않는다. 돈을 꼭 갚겠다고 약속해도 그 말을 믿지 못해 빌려주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더 나쁜 놈인가. 오래 알고 지내온 사람이 부탁하는데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 우리인가, 아니면 이자가 높긴 하지만 돈을 떼먹을 가능성이 큰데도 어쨌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업자인가.
고리대금업자를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막상 그들 자신은 다른 이에게 돈을 빌려주려 하지 않는다. 자기는 절대로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고리로 빌려주는 것을 욕하고 비난한다. 이때 ‘좋은 사람’ 순위를 따져보면 아마 이럴 것 같다.
①이자를 받지 않고 돈을 빌려주는 사람
②일반적인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사람
③높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사람
④돈을 빌려주지 않고 아무 말도 안 하는 사람
⑤ 자기는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는 건 욕하는 사람
고리대금업자는 ③이고 나는 ④에 해당한다. 급하게 돈이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고리대금업자를 찾고, 실제 돈을 빌려주는 사람도 고리대금업자다. 나보다 훨씬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다.
고리대금업자를 비난하는 이들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어려운 이들에게 높은 이자를 매기는 건 분명하니까. 하지만 고리대금업자를 비난하려면 자기가 좀 더 싼 이자율로 빌려줄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은 절대 빌려주지 않으면서 고리대금업자를 비난하는 건 또 뭔가. 자기가 빌려주지 않을 거라면 최소한 고리대금업자를 비난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최성락 박사는… |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양미래대에서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21년 투자로 50억 원 자산을 만든 뒤 퇴직해 파이어족으로 지내고 있다. |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92호에 실렸습니다〉
최성락 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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