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이고 낙서라는데…자꾸 무게를 얹고 싶은 건 [e갤러리]

4 days ago 9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얼추 30년 전이니 60년 화업에서 딱 절반, 반환점을 돌 때였다. 뭔가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사람의 거친 마음을 보듬는 일을 평생 ‘예술’이라고 믿어온 그이에게 변화라면 ‘순수가 더 깊어진’ 것일 테니. 그저 ‘무제’(1996)를 들여다보니 말이다. 이미 해왔지만 이후 해나갈 작가세계를 집약한 건가 싶어서.

오세열 ‘무제’(1996 사진=갤러리조은)

해방둥이 작가 오세열(80)은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으며 한 결론에 도달한다. 세상이 어둡고 폭력적일 때 기댈 건 인간 내면의 순수함뿐이라고. 유년의 감각으로 단순화한 반추상이 그 시작이다. 즉흥·솔직을 무기로 바보스러울 만큼 투명한 인물들을 등장시켰다. 이목구비를 다 갖춘 적도 없고 장난기 가득한 낙서 같은 이들이 작업의 한 축이었다.

다른 한 축은 ‘암시적 기호학’이라 불린 숫자의 세상이다. 1부터 10까지 무수히 반복했지만 의미도 상징도 없다. 슬쩍 기대했을 암호도 물론 아니다. “인간 삶과 감정에 스민 가장 기초적인 언어”를 나열했다니. 칠판에 분필로 써내려갔나 싶지만 물감을 쌓은 뒤 거꾸로 긁어낸 숫자란 게 특별한 점이라고 할까.

시작과 끝이 달라 작품명이 따로 없다는 수많은 작품 중 하나인 ‘무제’는 그렇게 축과 축을 연결하고 이전과 이후를 나눈다. 인물은 인물대로 숫자는 숫자대로 순수성을 좇아 나아간 ‘다시 30년’의 출발이었다.

9월 20일까지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갤러리조은서 여는 개인전 ‘오세열: 1965 이후’에서 볼 수 있다. 혼합재료. 145×209㎝. 갤러리조은 제공.

오세열 ‘무제’(1998), 혼합재료, 106×80㎝(사진=갤러리조은).
오세열 ‘무제’(2020), 혼합재료, 80×117㎝(사진=갤러리조은).
오세열 ‘무제’(2017), 혼합재료, 41×38㎝(사진=갤러리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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