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지휘자, 마에스트로가 아닌 '클라우디오'로 기억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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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최고의 교향악 축제 루체른 음악제가 지닌 오늘날의 정체성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통해 구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언급할 때 반드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바로 클라우디오 아바도이다. 그는 2001년 위암을 진단받고 투병 중에도 새로운 작품 세계 탐구와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병마와 싸우면서도 2003년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루체른 음악제를 유럽 최고의 교향악 축제로서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연주하기에 앞서 먼저 들을 줄 알아야 한다’라는 존중을 바탕으로 한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예술 철학, 그리고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 감독 시절을 거쳐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배경과 더불어 그의 연대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아바도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공연 모습 / 사진. © Georg Anderhub/LUCERNE FESTIVAL

아바도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공연 모습 / 사진. © Georg Anderhub/LUCERNE FESTIVAL

권위적인 카리스마보다는 인간적 소통과 존중

세계에서 유일하게 단원들이 지휘자를 선출하는 자존심 높은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은 1989년 카라얀의 후임으로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지목했다. 이후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전통에 얽매여 있던 베를린 필의 레퍼토리와 해석은 일대 변혁을 맞이했고, 그들의 소리는 한층 더 유연함과 신선함으로 빛나게 되었다. 권위적인 카리스마보다는 인간적인 소통으로 단원들을 존중하고 이끌었던 아바도는, 베를린 필 음악감독 재임 기간이 끝날 무렵 오랜 염원과 추진력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출범시켰다. 유럽의 유수 오케스트라의 수석 주자들, 명성 있는 실내악단 멤버들, 그리고 솔리스트 연주자들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클래식 음악 무대에서 활약하는 정상급 아티스트들로 구성된 초엘리트 앙상블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창단이 바로 그것이다.

마에스트로가 아닌, 클라우디오라고 불러주세요

오케스트라라는 조직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관점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창단의 꿈을 실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평생 실내악의 신봉자였으며, 젊은 시절 지휘자로 데뷔하기 전부터 실내악을 즐기고 가르친 경험을 바탕으로 음악은 함께 만들어 나가는 소통의 매개체로 파악했다. 아바도는 파트너의 소리에 늘 귀 기울이고 이해하며 더 나아가 적극 대응하려는 노력과 자발적 소통 의지를 음악가들의 기본 미덕으로 삼았다.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 감독 시절, 단원들이 그를 마에스트로라고 부르자 “아바도는 클라우디오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답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지휘자와 단원의 관계에서도 수직적인 방식이 아닌 수평적인 방식을 원했던 아바도에게 단원들은 다스려야 할 대상이 아닌 대등하게 교류하며 함께 음악을 만들어 가는 파트너였다.

클라우디오 아바도 / 사진. © Cordula Groth/Stiftung Berliner Philharmoniker

클라우디오 아바도 / 사진. © Cordula Groth/Stiftung Berliner Philharmoniker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 감독직과 병행하여 주관하고 추진했던 여러 유스 오케스트라들,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 말러 유스 오케스트라, 그리고 단원들이 성장한 후 이어진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갈 때에도 아바도는 ‘오케스트라 연주는 규모가 확대된 실내악이며, 인간적인 교류와 소통의 진보된 연장’이라는 기본 철학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젊은 음악인들로 구성된 실내악단들을 이끌어가는 일련의 과정들은 아바도로 하여금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데 있어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시금석의 역할을 했다. 그것은 또한 인간적 소통을 통한 꿈의 실현, 계획되지 않은 듯 자연스럽지만 치밀하게 진행된 장기적 프로젝트를 통해 드러난,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탁월한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확인시켜 준 계기이기도 하다.

엘리트 오케스트라 창단

1938년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엘리트 오케스트라 창단 이야기를 짚어보는 것도 흥미롭다. 오랜 기간 협업했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정치적 배경을 이유로 결별한 토스카니니는, 지인 음악인들을 모아 한 악단을 결성했고, 루체른 호숫가 트립셴에 있는 바그너의 집(Richard Wagner Musem, 현재의 바그너 뮤지엄으로 작곡가가 1866년부터 1872년까지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했던 곳)에서 ‘지그프리트의 목가(Siegfried-Idyll)’를 직접 지휘했다. 1938년 8월 25일,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갈라 콘서트는 전 세계 80개국 라디오로 생중계되었으며, 이는 곧 루체른 페스티벌의 기원이 되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훗날 토스카니니의 뜻을 계승 부활시키는 의미로, 그간 탄탄하게 기초를 다져 온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베를린 필과 비엔나 필의 수석 주자들, 명망 있는 실내악단 멤버들, 그리고 현역 솔리스트들을 영입했다. 이러한 엘리트 오케스트라 창단은 루체른 페스티벌을 본격화하는데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전설적인 콘서트 드 갈라 페스티벌의 탄생(1938) / 사진. © Jean Schneider/Archive Lucerne Festival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전설적인 콘서트 드 갈라 페스티벌의 탄생(1938) / 사진. © Jean Schneider/Archive Lucerne Festival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그의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탄생

2003년 8월 14일 루체른. 고감도 어쿠스틱과 찬란한 호수 빛에 투영된 비주얼을 자랑하는 프랑스 건축가 쟝 누벨의 초현대식 건축물, 루체른 컨벤션 센타 대공연장 로비는 온통 야릇한 셀레임과 흥분으로 가득 차있었다. 21세기 클래식 음악계 엘리트들의 염원으로 탄생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마침내 첫 울림을 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자비네 마이어(클라리넷), 에마뉘엘 파위(플루트), 알브레히트 마이어(오보에), 르노와 고티에 카퓌송(바이올린·첼로), 나탈리아 구트만(첼로), 하겐 콰르텟 등 그 이름만 나열해 보면 이 아티스트들이 한 무대에 서서 오케스트라를 구성한다는 발상은 한낱 이상주의자의 꿈이나 사치에 지나지 않는 듯 느껴진다.

그러나 1966년부터 루체른 페스티벌의 꾸준한 게스트 지휘자였으며 1997년부터는 베를린 필을 이끌고 루체른 무대에 섰던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은밀히 구상해 온 프로젝트는 마침내 첫걸음을 내디뎠다. 아바도를 지휘자의 길로 인도하고 영감을 준 작곡가 드뷔시의 작품 <성 세바스티안의 순교>와 <바다>가 루체른 컨벤션 센타 대공연장에서 울려 퍼졌고, 이로써 드디어 초특급 오케스트라 탄생이라는 아바도의 이상향이 실현된 것이다.

새로 창립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새로 창립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콘서트 드 갈라", 2003 / 사진. © Priska Ketterer / Lucerne Festival

전설이 된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밀라노에서 태어나 1960년 라 스칼라 극장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1963년 뉴욕에서 열린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당시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이었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주목과 후원을 받아 뉴욕 필을 객원 지휘했다. 번스타인은 그가 뉴욕에 머물며 활동을 이어가기를 권했지만, 아바도는 예술적 기반을 유럽에 두고자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1965년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발탁으로 잘츠부르크에서 빈 필하모닉을 처음 지휘했으며, 말러 교향곡 2번 <부활>로 호평받았다. 1967년부터는 양대 음반사인 도이치 그라모폰과 데카에서 본격적으로 음반 작업을 시작했다. 1968년부터 1986년까지 라 스칼라 극장 음악감독으로 재직하며 오페라 레퍼토리의 폭을 넓히고 현대 작품 소개에 힘썼다. 이어 1979년부터 1989년까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및 상임 지휘자를 맡는 한편,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정기적으로 객원 지휘하며 국제적 위상을 굳혔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1989년에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 상임 지휘자로 선출되어 2002년까지 재임했으며, 이 기간에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벌 음악감독도 겸임했다. 또한 1997년에는 젊은 연주자들과 함께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유럽 각지에서 신진 및 중견 연주자들의 에너지를 결집하며 화합의 소리를 만들어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모습, 2010 / 사진. © Priska Ketterer / Lucerne Festival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모습, 2010 / 사진. © Priska Ketterer / Lucerne Festival

2003년 아바도는 루체른 페스티벌의 예술 감독 미카엘 해플리거와 함께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를 새롭게 출범시켰다. 이 오케스트라는 토스카니니가 1938년에 창단한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스위스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아이디어를 부활시킨 프로젝트 오케스트라로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베를린 필하모닉과 빈 필하모닉 등 유럽 정상급 오케스트라의 수석 주자들, 현역 실내악단 멤버 및 솔리스트들을 합류시킨 ‘페스티벌 전속 오케스트라’이다. 첫 무대부터 말러 교향곡 2번 <부활>을 포함한 말러 교향곡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전개하며, 장년기의 미학을 응축한 해석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어 2004년에는 볼로냐를 중심으로 모차르트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고전 및 초기 낭만 레퍼토리에 자신의 이상을 투영했다.

말년의 아바도는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루체른을 거점으로 음악 활동을 이어갔으며, 2013년 8월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마지막으로 지휘봉을 잡았다. 2014년 1월 20일,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궤적은 라 스칼라, 런던, 빈, 베를린, 루체른을 아우르며 유럽 음악계를 관통했고, 그의 말러 해석과 투명하고 유연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미학은 오늘날의 표준으로 자리매김했다. 21세기 루체른 음악제의 바탕에는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정신이 깊이 새겨져 있다.

박마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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