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통신학 전공자가 캔버스에 남긴 사이버 상형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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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페이지갤러리 전시장 중앙에 자리잡은 관람객 참여형 설치 작품 '137 Silent Observers'. /Courtesy of The Page Gallery, Photo_ Joel Moritz

더페이지갤러리 전시장 중앙에 자리잡은 관람객 참여형 설치 작품 '137 Silent Observers'. /Courtesy of The Page Gallery, Photo_ Joel Moritz

‘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전시장에 울린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전시장의 중앙. 사각의 철제 프레임 꼭대기에 달린 카메라가 바닥을 향한 채 무언가를 찍고 있다. 지난 16일 최비오 작가의 개인전이 열리는 서울 성동구 더페이지갤러리 전시장의 모습이다.

최비오 작가의 개인전 ‘TIME INTERFACE’이 더페이지갤러리에서 진행된다. 2014년부터 2026년까지 작가가 형성해 온 조형 언어를 만날 수 있는 자리다. 그간 아트 페어에서 강렬한 색상의 작품 위주로 소개됐다면, 이번 전시에는 무채색의 작품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빛을 흡수하는 블랙부터 빛을 반사하는 실버, 코퍼 색상의 바탕은 관람자의 위치에 따라 다른 표면을 드러낸다. 특히 검정색은 빛을 99.965% 흡수하는 반타 블랙을 사용해 작품 간 대비를 극대화했다고 더페이지갤러리 관계자는 전했다.

반타 블랙과 실버, 코퍼 색상 등 무채색 작품 위주로 소개된 최비오 작가 개인전 'TIME INTERFACE'. /Courtesy of The Page Gallery, Photo_ Joel Moritz

반타 블랙과 실버, 코퍼 색상 등 무채색 작품 위주로 소개된 최비오 작가 개인전 'TIME INTERFACE'. /Courtesy of The Page Gallery, Photo_ Joel Moritz

무채색의 작품 위주로 배치한 것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도 관련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시간’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제시한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전시장 벽면에 쓰인 작가의 말처럼 작가는 시간은 화면 위에 재현되는 대상이 아니라 작품의 형성과 관람의 경험을 조직하는 조건으로 작동한다고 여긴다. 전시장 안에서 관람자의 움직임에 따라 빛이 다르게 반사되면 작품의 색이 변화한다. 작가는 이러한 변화를 작품 위에 시간이 축적되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전자통신학 전공자가 캔버스에 남긴 사이버 상형문자

전자통신학 전공자가 캔버스에 남긴 사이버 상형문자

이번 전시에는 작가의 새로운 시도도 공개됐다. 전자통신학을 전공한 작가는 양자 역학이나 물리학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전시장 중심에 자리잡은 '137 Silent Observers'는 세상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설명하는 숫자 137에서 영감을 얻은 것. 가로 세로 137cm 크기의 판 위에 137개의 돌멩이가 나선형으로 놓여 있다.

관람객은 돌멩이 하나를 옮긴 후 방명록에 이름을 남김으로 작업의 변화에 개입한다. 이중 은색으로 칠해진 두 개의 돌멩이는 바닥에 고정돼 움직일 수 없게 해뒀다. 두 개의 은색 돌은 작가가 놓은 시작(과거)과 마지막(미래)의 표시기 때문. 이 과정은 137초마다 한 번씩 사진으로 기록된다. 이후에는 이 작업을 영상화해 전시할 계획이라고.

전자통신학 전공자가 캔버스에 남긴 사이버 상형문자

최비오 작가의 작품은 캔버스를 가득 채운 기호들과 리드미컬한 선이 특징이다. 사람에 따라 상형문자나 반도체 회로, 웃는 표정, 서 있는 사람, 날아가는 새 등으로 보이는 도상으로 비춰진다. 이는 특정한 대상을 재현한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움직임과 에너지를 받아들인 감각의 흔적이다. 캔버스 위에 얇은 튜브형 물감을 짜내며 작업하는 작가는 모든 형상을 흐름에 따라 그려나간다. 일부 작품에는 사랑에 대한 글귀가 쓰인 종이를 태우고 남은 재를 물감과 섞어 캔버스 위에 흘려보내거나 중력에 의해 떨어트리기도 한다.

전자통신학 전공자가 캔버스에 남긴 사이버 상형문자

더페이지갤러리는 지난 3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테파프 마스트리히트(TEFAF Maastricht 2026)’에서 최비오 작가의 작품을 소개했다. 테파프는 38년간 명성을 이어온 글로벌 아트페어다.

김유정 더페이지갤러리 전시팀장은 “작품을 구매하면 자택에 설치해주기를 원하는 한국 컬렉터들과 달리, 유럽 컬렉터들은 페어 현장에서 작품을 구입해 직접 들고 가는 방식을 선호한다”며 “이 같은 성향을 고려해 지난해 최비오 작가의 소품 7점을 출품했는데 모두 완판되며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현장에서 판매된 작품들은 ‘Happy Cell’ 시리즈로, 이번 전시에도 함께 소개된다. 전시는 5월 30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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