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의 이란 지도부는 당황했다. “이런 강경 진압에도 물러서지 않는다고?” 그들을 더 당황하게 한 것은 10대 소녀들이 대거 나와 ‘여성, 생명, 자유’를 외치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그들은 몰랐다. 초기 시위를 주도하다 맞아 죽은 10대 소녀들이 블랙핑크의 이란 팬클럽 간부였고, 방탄소년단(BTS)의 팬클럽 ‘아미’ 멤버들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정부의 눈을 피해 몰래 연결과 뭉침을 경험한 세대였다.
#2019년 10월 BTS는 해외 가수 최초로 사우디아라비아 단독 스타디움 콘서트를 열었다. 3만 명 관객 다수는 여성이었다. 여성 인권이 최악이었던 사우디지만, 공연 나흘 전 자국 여성이 혼자서도 숙박업소에 투숙할 수 있도록, 또 외국인 남녀는 같은 방에 투숙할 수 있도록 이슬람 율법을 바꾸었다.왕족들도 10대들이 허벅지를 드러낸 남자들을 보며 환호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우디 아미의 주도 세력이 다름 아닌 공주이자, 후궁들이니 어쩔 수 없이 타협했다. 한류는 사우디 역사를 바꾸었다. 그리고 사우디 여성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우리도 바꿀 수 있구나.”
한류 팬들이 세상을 바꾸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중국 국무원이 1997년 홍콩 반환 이래 ‘최악의 위기’라고 했던 2019∼2020년 홍콩 민주화 시위 현장에선 발에 밟힌 BTS의 캐릭터 토끼 인형 사진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아미들을 격앙시켰다. 2019년 10월 칠레 지하철 요금 인상 시위에선 전 세계 K팝 팬들이 시위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 칠레 내무부의 보고서를 통해 공개됐다. 최근의 네팔, 튀르키예의 반정부 시위, 러시아의 반전 시위 등에서도 젊은 층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22일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열풍을 분석하면서 “119개국 2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을 한류 팬으로 여겼고 팬클럽의 68%가 K팝에 집중돼 있다”고 전했다. K팝 열풍이 얼마나 폭발적인지를 전하는 기사는 많지만, 그것이 10대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분석하는 기사는 많지 않다. 지옥 같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난민촌을 탈출해 시리아, 그리스를 거쳐 영국까지 온 BTS 팬인 10대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우린 언제 총에 맞아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어요. 하지만 BTS의 노래는 나도 중요한 사람이라는 자존감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어요. 그들의 노래가 아니었으면 난민촌 삶을 견뎌내지 못했을 겁니다.”
앞서 언급된 국가들은 대다수가 독재국가들이다. ‘국경 없는 기자회’가 매년 발표하는 언론자유지수에서 중국은 180개국 중 178위, 이란 176위, 러시아 171위, 사우디 162위, 튀르키예 159위를 기록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의 독재국가 에리트레아와 함께 번갈아 꼴찌를 기록하는 북한에선 K팝이 영향을 발휘할까. 김영미 분쟁 전문 프리랜서 PD는 몇 년 전 이란 한류 팬들을 취재할 때 “평양의 팬클럽과 소통하고 있다”는 증언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해외에 파견된 북한 외교관이나 무역 일꾼들의 자녀들은 아니었을까. 10여 년 전 중국에만 북한 국적자가 20만 명 넘게 상주했다. 같은 민족인 북한만큼 K팝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나라가 어디 있을까. 그들만큼 자유와 희망을 꿈꾸는 청년들이 어디에 있을까.
문제는 김정은 역시 오랜 해외 체류 경험으로 한류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2020년 12월 ‘반동사상문화배격법’을 시작으로 2021년 ‘청년교양보장법’, 2022년 ‘평양문화어보호법’ 등을 잇달아 제정해 한류의 싹을 자르려 애쓰고 있다. 한국 노래를 들으면 5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이는 북한이 한류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케데헌 열풍이 전 세계에 불면 김정은의 공포도 커진다. 하지만, 평양에 숨죽여 살 과거 아미들의 기억은 바꿀 수 없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K팝을 응원한다.“K팝이여. 세계를 쾅쾅 울려라. 평양까지 흔들어라.”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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