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중심으로 이른바 ‘영구 사기업(Forever Private)’ 모델을 택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기업공개(IPO) 대신 의도적으로 비상장 상태를 유지하며 사모 시장에서 천문학적인 기업 가치를 창출하는 업체들이다. 글로벌 자본 시장에서 기업의 자본 조달과 유동성 확보의 경로가 공모와 사모라는 '이중 궤도'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비상장 유지하는 오픈AI와 스페이스X
18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챗GPT’ 개발사 오픈AI의 수십억 달러 규모의 구주 매각(세컨더리 거래)을 추진하고 있다. 이 거래에서 회사 평가 가치가 약 5000억 달러로 책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인공지능(AI), 우주항공, 데이터 인프라 등 혁신적인 분야를 이끄는 일부 메가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 비상장사)은 의도적으로 비상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이 비상장을 유지하는 동기는 명확하다. 가장 큰 동기는 경영의 유연성과 통제권 유지라는 분석이 나온다. 공모 시장은 분기별 실적 발표에 대한 시장의 압박과 단기 주가에 회사 경영이 좌우되기 쉽다. 반면 비상장 상태에서는 이런 압박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연구개발(R&D)이나 대규모 설비 투자 등 전략적 목표에 집중할 수 있다. AI나 우주항공과 같이 막대한 초기 투자가 필요하고 성과 달성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분야에서 이런 유연성은 필수라는 분석이 나온다.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스페이스X도 마찬가지다. 스페이스X는 정기적인 '텐더 오퍼'(Tender Offer·공개 매수 방식의 지분 매각 프로그램)를 통해 직원에게 유동성을 공급하는 모델을 제도화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최근 이 회사는 약 4000억 달러의 기업가치를 기준으로 직원 지분 매각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스페이스X는 이미 현금 흐름에서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스타링크 등 장기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스페이스X는 공모 시장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로드맵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데이터 분석 및 AI 플랫폼 기업인 데이터브릭스는 투자 시장에서 1000억 달러 이상의 기업가치로 신규 자금 조달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후룬 연구소가 지난 7월에 발표한 '글로벌 유니콘 2025'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유니콘 기업은 1523개, 총가치는 5조 6000억 달러에 달한다. '상장사보다 비싼 비상장사'도 적지 않다.
이들 기업은 주기적이고 대규모 텐더 오퍼와 세컨더리 세일(구주 매각)을 활용한다. 이를 통해 IPO가 수행했던 핵심 기능인 인재 확보 및 초기 투자자 유동성 공급을 효과적으로 대체하고 있다. 기업이 IPO를 추진해야 하는 압력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업 전략을 최적화할 수 있는 자율성을 확보했다는 분석이다.
세계 최대 벤처캐피털(VC)인 a16z에서 성장 투자팀을 이끄는 데이비드 조지 파트너는 "현재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기업들은 거의 예외 없이 사모 시장에 있다. 그들이 왜 상장하겠는가? 그들의 야망을 실현하기에 충분한 자본이 사모 시장에 있다. 공모 투자자들의 분기별 실적 압박과 단기적 시각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진정한 가치 창출은 이제 (거래소의) 벨이 울리기 전에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스티브 블랭크 스탠퍼드 대학 교수도 "우리는 6~8년의 IPO 주기가 10~14년으로 늘어나는 것을 보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지연이 아니다. 자본 형성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다. 가장 중요한 사회적, 경제적 영향력이 단련되는 폭발적 성장 단계의 대부분이 이제 사모 시장의 장막 뒤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IPO 대체하는 '비밀 주식 시장'
'영구 사기업' 현상은 이를 뒷받침하는 사모 자본 시장의 성장이 요인이다. 세컨더리(구주 매각) 마켓의 성장은 과거 IPO만 제공했던 유동성 공급 기능을 상당 부분 대체했다. 글로벌 투자은행 제프리스에 따르면, 전 세계 세컨더리 시장 거래 규모는 지난해 1620억 달러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글로벌 세컨더리 시장은 올해 상반기만 1030억 달러를 기록해 상반기 기준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이는 전통적인 엑시트(투자금 회수) 경로인 IPO나 인수합병(M&A) 시장의 변동성과 무관하게 사모 시장에서 자체적인 유동성 수요가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준다.
관련 플랫폼의 발달도 사모 시장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과거 비상장 주식 거래가 주로 비공식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파편적이고 불투명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포지 글로벌'이나 '나스닥 프라이빗 마켓'과 같은 제도화된 플랫폼이 시장의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서비스는 단순히 구매자와 판매자를 연결하는 중개인을 넘어, 복잡한 거래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기술 기반의 시장 운영자로 진화했다는 평가다.
이들 플랫폼은 자격을 갖춘 투자자(기관, 패밀리 오피스, 적격 개인 투자자)와 주식을 보유한 직원 및 초기 투자자들을 위한 표준화된 거래 환경을 제공한다. 복잡한 주주명부 관리, 주식 이전 절차, 발행사의 승인 프로세스, 결제 및 증권 보관 등 거래에 수반되는 모든 과정을 기술적으로 지원해 거래의 효율성과 신뢰성을 높였다. 세컨더리 전문 플랫폼인 포지는 올 상반기 거래 대금이 14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미 작년 연간 거래액(13억 달러)을 상회하는 성장세를 보였다.
사모 시장의 제도화 과정에서 관련 데이터의 체계적인 수집과 유통도 중요하다. 과거 비상장 기업의 가치는 정보 비대칭성으로 불투명했다. 최근에는 데이터 표준화를 통해 가격 발견 기능이 강화됐다. 나스닥 프라이빗 마켓이 올 6월 출시한 'Tape D' API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다. 다양한 곳에서 비상장 기업 관련 데이터를 집계하는 서비스다. 스타트업의 신규 투자 유치 시의 주당 가격, 세컨더리 시장에서의 호가 및 실제 체결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영구 사기업' 모델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은 '주기적 유동성 공급' 모델의 정착이다. 이는 주로 기업이 직접 후원하는 '텐더 오퍼' 형태로 이루어진다. 텐더 오퍼는 회사가 지정한 제3의 투자자(기존 주주인 대형 펀드나 신규 투자자) 혹은 회사 자신이 직접, 정해진 기간 동안 정해진 가격으로 기존 직원 및 투자자의 주식을 매입하겠다고 제안하는 공개 매수 방식이다.
이 모델은 참여하는 대부분 관계자에 다양한 이점을 제공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IPO에 대한 내부 주주의 압박을 완화한다. 주식 보상을 실질적인 부로 전환해 핵심 인재를 유지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직원 입장에서는 수년간 묶여 있던 스톡옵션을 IPO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현금화할 수 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유망한 비상장 기업의 지분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다. 스페이스X와 오픈AI가 정기적으로 수십억 달러 규모의 텐더 오퍼를 성공적으로 실행했다. 이 모델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 기업 관련 자본 시장의 구조적 재편은 각국 규제 환경의 분화도 촉발했다. 미국은 사모 시장의 성장을 촉진하고 접근성을 확대하려고 한다. 지난해 6월 미국 제5순회항소법원이 증권거래위원회(SEC)가 2023년에 제정한 포괄적인 '사모펀드 운용사 규칙'을 전면 무효화한 판결을 내렸다. 해당 규칙은 사모펀드의 수수료 공시 강화, 세컨더리 거래 시 공정성 의견서 의무화 등 광범위한 규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법원은 SEC가 의회가 부여한 권한을 넘어섰다고 판단하며, 사모 시장에 대한 SEC의 규제 확대 시도를 좌절시켰다.
반면 영국과 유럽연합(EU)은 자국 공모 시장의 매력을 높여 IPO를 유치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영국 금융행위감독청(FCA)은 지난해 7월 발효된 1단계 관련 개혁에서 기존의 복잡했던 '프리미엄/스탠더드' 상장 구분을 단일 상장 범주로 통합했다. 최대주주와의 거래나 대규모 인수합병 시 주주총회 승인 의무를 완화하는 등 상장 요건을 대폭 낮췄다는 평가다. 올 7월에는 유상증자 및 공모 절차를 간소화하는 내용을 포함한 2단계 개혁을 발표했다.
혁신 기업 성장의 열매는 소수에게
자본 시장에서 사모 부문의 성장은 단순히 금융 시장 내부의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부의 분배 구조, 글로벌 자본 흐름, 경제 성장 동력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 우선 부의 집중과 불평등 심화 가능성이다. 오픈AI와 같은 기업이 불과 몇 년 만에 기업 가치가 수천억 달러로 급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부는 극소수의 창업자, 핵심 직원, 그리고 소수의 투자자에게 집중됐다. 일반 대중은 이런 폭발적인 성장 단계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이는 공모 시장의 일종의 '사회적 계약'을 약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모 시장은 일반 대중이 경제의 가장 역동적인 기업의 성장에 투자하고, 그 과실을 공유하는 통로다. '기회의 사다리'로 여겨졌다. 20세기 중반 이후 주식 소유의 대중화는 중산층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됐다. 하지만 이제 그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벤처캐피털 a16z의 분석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상장한 기업들은 시가총액의 50% 이상을 비상장 단계에서 이미 형성했다 반면 2014~2019년 사이 상장한 기업들은 그 비율이 20% 미만에 불과했다. 이는 기업 생애주기에서 가장 높은 수익률이 기대되는 구간이 사유화됐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혁신 과실의 사유화'는 부의 불평등을 심화하고, 자본 소득이 노동 소득을 압도하는 현상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글로벌 자본 시장의 이중 궤도화 현상에 한국 자본 시장도 대응하고 있다. 활발한 IPO 시장을 유지하면서 비상장 시장의 제도화와 기관 투자자의 역할 확대를 모색하고 있다. 올해 국내 IPO 시장은 뚜렷한 활황세를 보였다. 글로벌 회계·컨설팅 법인 EY한영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 IPO는 38건으로 최근 22년 내 상반기 기준 2위의 성과를 기록했다.
국내 벤처투자 시장 역시 회복세를 보였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신규 벤처투자액은 5조 7000억원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3.5% 증가했다. 하지만 국내에선 전형적인 '영구 사기업' 모델을 보기 어렵다. 국내 VC업계 관자는 "국내에는 오픈AI처럼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기업을 찾기 어렵고 미국만큼 국내 VC 시장이 크지 않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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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