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만드는 마음[내가 만난 명문장/함지은]

5 days ago 8

“수단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진리의 일부이다. 진리의 추구는 그 자체로 진실해야 한다. 진실한 추구란 각 단계가 결과로 수렴된 수단의 진실성을 의미한다.”

―조르주 페렉 ‘사물들’ 중

함지은 북디자이너·북디자인 스튜디오 상록 대표

함지은 북디자이너·북디자인 스튜디오 상록 대표
‘사물들’에 인용된 카를 마르크스의 문장을 읽었을 때, 디자인이라는 일에 관한 생각이 조용히 정리되는 듯했다. 활자의 형태, 여백의 밀도, 색채의 농도, 종이의 질감… 디자이너가 하는 모든 선택이 결과로 향하는 ‘수단’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진실하지 않다면 결과 역시 온전히 설득력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북디자인은 책의 ‘첫 언어’다. 독자는 표지를 통해 책에 담긴 이야기의 결을 가늠한다. 디자이너는 글과 독자 사이를 잇는 다리의 역할을 하며 언어를 충실히 시각화하는 책임을 갖는다. 어떤 글에는 고요한 간격이 어울리고, 어떤 글에는 강렬한 색의 대비가 필요하다. 그 판단은 텍스트와의 긴 대화 속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디자인은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드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두지만 그것이 단순한 장식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의미 없는 장식은 오히려 메시지를 흐리게 만든다. 모든 결정은 텍스트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흘러야 하며, 그 과정은 책이 가진 고유한 목소리와 진실하게 호흡하는 여정이어야 한다. 마르크스의 문장에서 시작된 디자인이라는 일의 본질에 대한 사유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길을 잃을 때마다 다시 책의 곁으로, 컴퓨터 앞 내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줬다.

디자인은 결국 타인의 언어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시각의 언어로 번역하는 섬세한 과정이다. 그리고 그 번역이 진실할 때, 비로소 책은 독자에게 온전히 말을 걸 수 있게 된다. 오늘도 내 자리로 돌아와 활자를 다듬고 종이를 고르는 일에 진심을 다하며 독자에게 진실한 대화를 건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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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지은 북디자이너·북디자인 스튜디오 상록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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