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사랑이라는 ‘오래된 환상’을 해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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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시대의 종말/비비언 고닉 지음·홍한별 옮김/208쪽·1만8000원·엘리


영국 소설가 조지 메러디스(1828∼1909)가 1885년 발표한 소설 ‘크로스웨이스의 다이애나’에서 주인공 다이애나 워릭은 사랑하는 남자 퍼시 데이셔를 배신한다. 정치인 퍼시가 자신에게 털어놓은 곡물법 폐지 관련 기밀을 한밤중 신문 편집자에게 팔아넘겼다.

미국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이 장면을 “소설의 결정적 순간”이라고 본다. 다이애나가 사랑에 빠진 순간, 자신이 다시 누군가에게 예속될 것이라는 공포를 감지해 비이성적인 행동을 했다는 해석이다. 다이애나에게 사랑은 행복한 여생으로 향하는 낭만적 수단이 아니라, 한 여자의 독립을 위협하는 불안으로 작용했다.

‘연애 시대의 종말’은 20세기 문학 속 사랑과 결혼을 통해 ‘사랑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근대적 신화가 어떻게 힘을 잃었는지를 추적한 비평 에세이다. 1997년 영어권에서 출간돼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비평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책으로, 29년 만에 국내에 번역됐다.

저자는 제인 스마일리의 소설 ‘비탄의 시대’를 읽은 뒤 “그렇게 그들은 결혼해서 평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서사의 종말을 떠올린다. 한때 문학에서 사랑은 인간을 완성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강력한 은유였다. 그러나 저자는 “오늘날 사랑을 은유로 사용하는 것은 발견의 행위가 아니라, 향수”라고 일갈한다.

책은 ‘크로스웨이스의 다이애나’뿐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 이디스 워턴 등의 작품을 두루 읽어낸다. 여기에 미 역사학자 헨리 애덤스의 부인이었던 클로버 애덤스, 철학자 해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의 관계 같은 실존 인물의 삶도 함께 놓는다. 해방의 언어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강력한 구속의 수단인 ‘사랑의 두 얼굴’을 포착한 저자의 관점은 오늘날에도 크게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과연 사랑은 인간을 더 자유롭게 만드는가. 사랑에 대해 저자가 드리운 냉철한 시선은 ‘독립적인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한번 더 고민하게 한다. 낭만적 사랑의 신화가 걷힌 뒤 비로소 드러나는 관계의 문제를 차분히 들여다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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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원 기자 4g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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