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한국은 일본의 곰고기 자판기 소식으로 한바탕 떠들썩했다. 야생 곰고기부터 고래고기까지 자판기 아이템으로 연이어 등장하는 일본을 두고 ‘자판기 강국’이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이 소동의 이면에는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일본 자판기 시장의 진화 동력은 단순히 ‘무인’이라는 편의성에 있지 않다. 어떤 고객 경험을 설계하며 어떤 방식으로 브랜드와 지역을 마케팅할 것인지 고민이 담긴 콘텐츠 힘에서 비롯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비대면 소비가 자리 잡자 자판기는 뚜렷한 콘셉트를 입기 시작했다. 식품은 하나의 ‘미식 경험’을 제공하는 제2 공간이 됐고 지역 특산품, 라이프스타일 굿즈, 아로마 제품까지 장르의 경계를 허물며 반경을 넓히고 있다.
자판기 왕국이 된 이유
일본이 ‘자판기 천국’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작은 1960년대 코카콜라 자판기 등장이었다. 이후 1970년대 들어 각종 캔음료가 쏟아지고 동전이 대량 유통되면서 폭발적으로 늘었다. “자판기 한 대를 두는 것은 가게 하나를 여는 것과 같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전성기인 2000년 일본 전국의 자판기 설치 대수는 560만 대로, 국민 23명당 한 대꼴이었다. 낮은 범죄율 덕분에 도난이 일어나지 않았고, 현금 결제 문화 덕에 동전을 처리할 수단으로 자판기가 정착됐다. 일본 특유의 장시간 노동 문화는 24시간 열려 있는 자판기를 사회 인프라로 만들었다.
음료 자판기가 전부가 아니다. 군마현 고속도로 인근 나나코시 휴게소에는 1970~1980년대 감성의 낡은 자판기에서 즉석 우동과 라멘, 토스트가 나온다. 이 투박함이 SNS를 타고 퍼지며 중장년에게는 향수를, Z세대에게는 아날로그 감성인 ‘에모이’(エモい·감성적이라는 뜻)를 건드렸다. 전국에서 레트로 자판기를 순례하는 사람이 생겨났고, 군마 레트로 자판기 지역은 하나의 관광 루트가 됐다. 90년 역사의 테이크아웃 스시 전문점 ‘교탄(京樽)’은 2022년 냉동 스시 자판기를 선보였다. 전통 스시 ‘자킨즈시’를 급속 냉동해 24시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자레인지로 데우면 맛이 살아난다는 반응에 힘입어 회전초밥 체인 스시로와 협업하며 매장을 늘렸다.
JR동일본은 자판기를 더욱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후루사토 아큐아(ふるさとアキュア)’ 프로젝트를 통해 역 안 자판기를 지역 특산품을 퍼뜨리는 역할로 탈바꿈시켰다. 군마현 미나카미마치 벌꿀과 아로마 제품이 도쿄역 자판기에서 나오고, 오미야역에서는 후쿠시마 덴에이무라의 ‘세계 최고 쌀’이 판매됐다. ‘작은 안테나숍’으로 불리는 이 자판기는 지역 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참가 신청을 공개 모집할 정도다. 같은 오미야역의 또 다른 자판기는 각국 항공사 기내식과 역도시락을 담아 여행자의 발길을 잡아끈다.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모지코에는 더 따뜻한 스토리가 숨어 있다. 야키카레로 유명한 이 항구 마을의 사카에마치 상점가 주류 매장 ‘시마다’(SHIMADA) 앞에는 자판기 두 대가 있다. 야키카레를 비롯해 국산 참복 회 세트, 이마리규 된장 호르몬, 지역 디저트가 있으며 당일 메뉴가 바뀌기도 한다. 이 자판기는 코로나19 시기 관광객들이 찾아왔다가 문 닫힌 가게 앞에서 발길을 돌리는 모습을 보고 기획한, 일명 ‘잠들지 않는 상점가 프로젝트’다. 자판기 기획자는 “이 음식을 먹어보고 맛있다면 다음엔 직접 그 가게에 가줬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자판기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골목으로 향하는 프롤로그라는 역발상이다.
변화의 길목에 자판
물론 일본 자판기산업에도 위기의 그림자는 있다. 2024년 기준 일본 전국의 자판기 설치 대수는 204만 대다. 2013년 정점 대비 20% 감소했고 2050년에는 100만 대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망했다. 특히 음료 분야 감소세는 더 가파르다. 2024년 자판기 음료 판매량은 4200만 상자로, 정점이던 1997년(7200만 상자)의 58%에 그친다.
원인은 편의점, 물가 상승, 사람 부족이다. 자판기 음료 판매가는 인근 편의점보다 평균 20%가량 비싸다. 3년간 이어진 물가 상승으로 소비자가 지출을 줄이자 타격이 컸다. 또 상품 보충과 재고 관리는 여전히 사람이 해야 한다. 2024년 트럭 운전기사 연장근무 규제 시행 이후 인력난은 더 심해졌다. 리테일 분석가 나카이 아키히토는 “자동화된 것은 판매뿐이다. 사람이 확인하기 전까지는 데이터를 알 수 없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업계 3위 다이도그룹은 최근 사상 최대 연간 손실을 기록한 뒤 전체 27만 대 가운데 2만 대를 철거하기로 했다. 다카마쓰 도미야 사장은 “자판기 사업이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최우선 과제는 출혈을 멈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식품 자판기는 2024년 말 기준 8만1200대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음료가 빠진 자리에 지역 콘텐츠가 채워지는 추세다.
한국에서도 시작된 변화
한국에서도 무인 점포와 셀프 계산대는 일상이 됐다. 인건비 상승, 인력 부족, 비대면 소비 선호 등 일본이 자판기 왕국을 만든 조건과 겹친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무인 판매는 아직 ‘편의’ 중심이라는 점이다. 반면 일본의 실험은 지역 명물과 이야기를 담아 소비자를 그 지역으로 이끄는 발신 플랫폼 역할을 한다. 서울역에서 제주 한라봉 주스를 만나고, 부산 노포 어묵을 가져가고, 전주 비빔밥 밀키트를 사는 풍경은 머지않았다. 자판기 한 대가 지역 소상공인과 소비자를 연결하는 입구가 되는 방식이다.
도쿄역에서 쌀을 사고, 오미야역에서 기내식을 맛보고, 모지코 자판기에서 야키카레를 맛본 뒤 다음 여행지를 저장한다. 버튼을 누르는 행위는 단순한 구매가 아니라 그 도시를 기억하고 언젠가 골목을 찾아가게 만드는 작은 예고편이다. 자판기 왕국의 전성기는 지났다. 그러나 이 아날로그적인 기계는 더욱 지역적이고 인간적인 플랫폼으로 진화 중이다. 작은 버튼 하나로 우리는 어디까지 여행할 수 있을까.
김현주 아트플롯 디렉터(Wave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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