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예술에는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힘이 있다. 앤터니 곰리(74)가 영국 북동부의 작은 도시 게이츠헤드에 세운 ‘북방의 천사’가 그랬다. 쇠락한 탄광촌이던 이곳에 작품이 들어서자 이를 보기 위해 유럽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활기를 되찾은 게이츠헤드는 문화·예술 중심의 도시 재생 프로젝트를 가동해 연간 685만 명(2023년 기준)이 찾는 관광지로 변신했고, 덕분에 지역 주민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 조각 거장 곰리의 시선은 한국에 못 박혀 있다. 2022년부터 전남 신안군에 초대형 설치 작업 ‘비금도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그는 올해 한국에서 전시를 세 개나 선보인다. 강원도 원주 뮤지엄산에서 6월 20일에 개막한 ‘드로잉 온 스페이스’(Drawing on Space)와 9월 서울 청담동 화이트큐브, 한남동 타데우스 로팍에서 여는 전시다.
뮤지엄산 개인전은 그중에서도 단연 압도적 규모를 자랑한다. 조각과 드로잉, 설치 작품을 아우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곰리 전시로,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협업해 그의 작품을 상설로 보여주는 전시관 ‘그라운드’(Ground)까지 지었다. 뮤지엄산 전시를 위해 방한한 그를 만나 작품 세계의 변화와 한국 전시에 대해 물었다.
안도 다다오와 보여주는 ‘몸의 공간’
곰리는 평생 ‘인체와 우주의 관계’라는 하나의 주제에 몰두했다. 하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과 모양은 끊임없이 변화했다. 20대 시절 곰리는 자신의 몸을 그대로 본뜬 등신대 조각을 만들었다. 반면 이번 전시작 대부분은 추상 작품에 더 가깝다. 특히 ‘오르비트 필드’(Orbit Field)에서는 인체와 비슷한 모양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변화는 어디서 왔을까.
▷초기작은 실제 사람의 몸과 형태가 거의 똑같습니다.
저는 줄곧 ‘인간의 한 순간을 공간 속에서 잡아낸 결과물’을 만들어왔습니다. 이를 통해 공간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싶었어요. 인간의 몸과 공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을요. 처음에는 제 몸에서 직접 뜬 석고 몰드를 바탕으로 납 조각을 만들었습니다. 그 조각의 안쪽에는 빈 공간이 있어요. 제가 한때 머물던 곳이자, 한 인간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공간을 뜻하죠. 그러다 보니 저는 그 공간을 물질로 만들어 존재감을 더욱 강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철로 속을 꽉 채운 조각을 만들었습니다.
▷갈수록 작품이 추상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작업이 점점 진화하면서 저는 관람객과 작품이 더 밀접한 관계를 맺기를 원했습니다. 블록 모양을 쌓아 올려 인체를 표현한 건 작품에 시대를 반영하려는 시도였어요. 디지털 시대와 픽셀(Pixel)을 표현한 거죠. 그 후에 저는 쇠막대나 철망 등을 사용해 더 열려 있는 구조, 추상적인 구조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관람객의 몸과 작품이 뒤섞이고, 나아가 관람객의 몸이 작품 속에 포함되는 느낌을 주고 싶었거든요. ‘오르비트 필드’ 연작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개념입니다. 관람객의 몸이 작품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경험까지를 작품에 포함시킨 겁니다.
▷ 전시 제목인 ‘드로잉 온 스페이스’는 무슨 뜻인가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어요. 오르비트 필드처럼 공간 위에 그린(draw) 3차원 드로잉이라는 것, 그리고 공간이라는 그물이 우리를 끌어당긴다(draw)는 것. 이번 전시에 나온 저의 곡선 조각 작품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축물 안쪽의 직각 모서리와 만나 관객의 감각을 일깨웁니다. 이는 인간과 건축, 인간과 공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보게 만들고, 자신의 몸이 차지하는 공간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제 작품이 늘 그런 것처럼요.
▷이번에 안도와 지은 전시관 ‘그라운드’는 어떤 공간인가요?
안도의 작품은 인간과 빛, 땅의 관계를 오감으로 느끼게 합니다. 재료, 채광, 디자인 등을 극도로 섬세하게 조율한 덕분이죠. 그의 작품을 통해 저는 ‘몸으로 건축을 느끼고, 건축으로 공간을 느낀다’는 시각을 배웠습니다. 그라운드는 그 결과물이에요. 작업을 하면서 안도와 저는 재료, 질량, 공간, 그리고 빛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곳은 밖으로 열려 있어 자연과 날씨를 그대로 받아들여요. 관객은 이곳에서 자신의 몸과 빛, 시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게 되죠. 건축물 북쪽에 개방된 부분으로 보이는 산등성이의 윤곽은 이런 감각을 더욱 또렷하게 해줍니다.
▷어떤 작품들이 나와 있나요?
큰 철제 블록을 쌓아 만든 최신 작품 7점이요. 늘 그래온 것처럼 주제는 ‘인간의 몸이 차지하는 공간’이지만, 이 작품들은 인간의 몸을 일종의 건축물처럼 표현하고 있죠. 블록으로 만든 7개의 조각이 더욱 고요하면서도 단단한 존재감을 강렬하게 뿜어낼 수 있도록 의도했습니다.
▷그라운드에 들어온 관객이 무엇을 느끼기를 바라나요?
인간은 모두 유한한 존재이기에 태어날 때부터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라운드는 그 감각을 더 잘 느낄 수 있도록 돕죠. 마치 불교의 명상처럼요. 불교의 명상은 몸의 움직임을 멈추고 고요한 상태로 만드는 단계부터 시작합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자신의 들숨과 날숨,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의 움직임과 같은 자연의 리듬을 훨씬 더 가깝게 느끼게 되죠. 그 상태에서 작품을 보면 공간과 몸, 시간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할 수 있을 겁니다.
몸, 그 존재의 유한함
불교 명상에 대한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곰리의 예술 철학은 불교와 깊이 연관돼 있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뒤 인도와 스리랑카로 떠난 여행에서 불교를 접하고 그 사상에 푹 빠졌다. 지금도 매일 명상 훈련을 할 정도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돼 있다는 연기緣起 사상, 우주의 만물은 영원히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등 불교의 핵심 철학은 그의 작품을 관통한다.
▷불교 철학에서 배운 핵심은 무엇인가요?
내 몸, 내 삶, 내 감각이라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세상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That you can use your existence to examine existence).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제 작품 주제인 몸과 공간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근원입니다. 몸이 없다면 삶은 존재하지 않아요. 공간이 없다면 우리가 움직이고 나아갈 자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137억 년 전 시작된 질량과 에너지의 끊임없는 교환 과정, 그 영원 속에 존재하는 찰나의 형태일 뿐이죠. 제 작업은 그 사실을 다시 일깨워주는 하나의 장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몸과 존재의 유한함을 다시 바라보고, 이를 통해 자연, 우주, 에너지, 시간과 같은 더 큰 것들을 성찰하는 실험장이랄까요.
▷지금도 불교 명상을 하나요?
작년에 미국 댈러스에서 열리는 대규모 전시회를 준비하며 몸을 본뜨는 몰딩 작업을 세 번 다시 해야 했습니다. 조각을 만들기 위해 2시간 가까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버틴다는 게 얼마나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지 새삼 깨달았죠. 그때 명상 훈련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제 몸을 직접 본뜰 일은 많지 않겠군요.
3차원 디지털 스캔, 수학, 컴퓨터공학 등을 작품에 도입했으니까요. 이런 기술을 이용해 저는 ‘존재의 순간’을 더 잘 포착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늘 변하는 불안정한 존재거든요. ‘리미널 필드’(Liminal Field) 연작은 신기술 도입의 효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대표적 예시입니다.
▷신기술을 활용해 예술을 한다는 게 조금 생소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현실 세계를 시각적으로 더 잘 표현할 수 있다면, 저는 어떤 도구도 기꺼이 사용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이버 시대에 살고 있어요. 집을 나설 때면 스마트폰을 꼭 챙기죠. 스마트 기기가 ‘제2의 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디지털 기술을 통해 생각하고, 관찰하고, 감각하고, 살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술 작품은 이런 삶의 변화를 담을 수 있어야 하죠. 특히 조각은 몸으로 체험하고 감각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예술입니다. 그런 만큼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야 하죠.
조각, 장소를 만드는 힘
▷말씀대로 모두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시대입니다. 이럴 때 조각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조각을 볼 때 사람들은 작품 주변을 걸으며 공간을 직접 경험하고 인식하게 됩니다. 자신이 단순히 ‘무언가를 보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 속에 놓인 ‘존재하는 존재’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죠. 기계를 통해 세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이 산만한 시대에, 조각은 원초적이고 직접적인 ‘존재의 경험’을 조용히 전해줍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예술이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예술은 삶을 드러내는 방식이죠. 걸음걸이나 말투에 사람의 성격이 반영되는 것처럼, 예술은 삶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함께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랬고요. 노래나 춤, 요리 같은 영역이 여전히 우리 삶 속에 녹아 있는 것처럼요. 하지만 미술은 미술관, 갤러리, 개인 소장품 안으로 숨어버렸습니다. 전시가 있을 때면 잠깐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곤 하죠. 이는 매우 부자연스럽고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특히 조각은 문제가 심각해요.
▷어떤 문제인가요?
공공장소에 놓인 조각에는 그 장소를 새롭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장소를 기억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가 되기도 하죠. 하지만 근대 이후 조각의 이런 역할은 급격히 줄었습니다. 여기엔 조각가들의 문제도 있어요. 요즘의 공공 조각은 조각이 놓인 장소를 단순히 장식하는 데 그칠 뿐, 그 장소와 깊이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공공 조각은 어때야 하나요?
공공 조각이 놓이는 장소는 인간의 상호작용이 이뤄진 구체적 역사와 의미를 지닌 공간입니다. 좋은 예술은 이런 장소의 특성과 공명하고 이를 증폭시킬 수 있어야 하죠. 신안에서 진행 중인 비금도 프로젝트에서도 이런 점을 각별히 신경 쓰고 있습니다.
▷비금도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자세히 설명하기는 이르지만, 좋은 방향으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규모도 크고 정말 흥미진진한 여정이에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팀은 마치 하나의 부족처럼 함께 진화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정신과 특성을 많이 배울 수 있었죠.
“온몸으로 느끼세요”
▷전시를 준비하며 느낀 뮤지엄산은 어떤 장소인가요?
예술과 자연을 나란히 바라보며 사유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대 조각 컬렉션이 탁 트인 전망 속에 자리 잡고 있고, 제임스 터렐의 작업에서는 공간이 빛으로 전환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죠. 예술과 자연이 잘 어우러진 공간이에요. 덕분에 관객들은 이곳에서 예술이 더 넓은 차원과 통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겁니다.
▷뮤지엄산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작업이 있나요?
‘리미널 필드’는 제작한 지 거의 10년이 됐는데, 어울리는 전시 장소를 마침내 뮤지엄산에서 찾을 수 있었어요. 인간의 삶과 광활한 지평에 대한 사유를 함께 담아낼 수 있는 탁월한 장소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당신의 드로잉 작품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저는 매일 드로잉 작업을 합니다. 드로잉은 생각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이에요. 뇌파처럼 우리 존재의 흔적을 옮기는 행동일 수도 있고, 그저 놀이일 수도 있으며, 단순히 선을 긋는 행위이기도 하죠. 최초의 예술도 구석기인이 세계 곳곳의 동굴 벽에 그린 그림이었잖아요. 예술은 거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에 나온 드로잉은 제 삶의 기록이자 예술의 출발점입니다.
▷어떻게 봐야 전시를 잘 감상할 수 있을까요?
생각은 잠시 접고, 당신이 마주하는 작품과 그 순간을 오롯이 느껴보세요. 작품은 무언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쇠는 쇠고, 알루미늄은 알루미늄이며, 잉크는 잉크일 뿐이죠. 이 물질들은 당신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요소와 관계를 맺으며 존재합니다. 예술은 바로 그 관계를 깨닫는 순간에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