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생활수급자인 60대 A씨는 지난 5월 대전 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를 찾았다. 저신용·저소득자에게 최대 100만원을 빌려주는 ‘불법사금융예방대출’을 받아 당장 밀린 월세 30만원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발목을 잡은 건 높은 신용점수다. 수입이 전혀 없지만 과거 은행 거래 이력 때문에 신용점수가 821점이었다. 결국 고신용자라는 이유로 대출이 거절됐다. 높은 신용점수 때문에 빈곤층이 정책금융을 받지 못한 것이다.
신용점수가 상향 평준화되는 ‘신용점수 인플레이션’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헌승 국민의힘 의원이 나이스평가정보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신용점수 900점 이상(1000점 만점) 비중은 48.1%로 집계됐다. 950점 이상인 초고신용자 비중도 24.7%였다. 국민 4명 중 1명이 초우량 신용자로 대부분 연체 없이 은행과 거래한 금융소비자다.
신용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 신용평가의 변별력은 줄어든다. 시간이 갈수록 고신용자 비율은 높아지는 반면 제도권 금융 거래 기간이 짧은 소비자는 차별받는다. 사회초년생과 전업주부 등 금융 거래 실적이 부족한 이른바 ‘신파일러’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기준 국내 신파일러는 1236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제2금융권이나 대부업체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은행 고객 중심의 신용점수 인플레이션이 금융 취약계층을 고금리 시장으로 내모는 구조다.
K자형 신용 인플레이션의 해법으로 등장한 게 ‘대안 신용평가’다. 통신비 등 비금융 정보를 활용해 ‘과거 금융기록’에 치중한 기존 신용평가 방식에서 벗어나자는 취지다. 하지만 복잡한 기업 간 데이터 결합 절차와 깐깐한 개인정보 동의 규제에 막혀 여전히 보조 수단에 머물고 있다.
반면 규제가 덜한 금융 선진국에선 ‘현금 흐름’ 중심의 신용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미국은 공과금·통신비·임차료 납부 이력 등을 인공지능(AI)으로 분석해 대출 심사에 활용한다. 영국도 오픈뱅킹을 기반으로 계좌 흐름과 소비 패턴을 분석해 신용평가에 적극 반영하는 추세다.
한국도 금융위원회 주도로 신용평가 체계를 개편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고신용=저금리, 저신용=고금리’로 굳어진 현행 체계를 재검토하겠다는 게 정부 구상이다. 고신용자와 중·저 신용자 간 지나친 금리 격차를 줄여 금융 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얘기다.
그러려면 먼저 외국처럼 비금융 데이터 활용을 막는 규제를 완화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은행 고객들만의 리그가 된 신용 인플레이션을 바로잡고 중·저신용자도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 과도한 이자 부담을 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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