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산업을 육성하겠다는 대선 공약들이 과거처럼 공염불이 되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한 AI 관련 기업 대표에게 최근 대선 주자들의 AI 진흥 공약을 평가해달라고 부탁하자 돌아온 답변이다. 이 대표는 “구체적인 계획이나 재원 마련 방안 없이 수백조원을 투입하겠다고 외치는 정치권의 목소리는 공허하다”며 “AI가 대선 주자들의 미래지향적 이미지를 부각하는 수단으로만 활용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덧붙였다.
이번 대선에 나선 주자들은 한결같이 AI 분야를 대대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발표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난달 28일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에서 AI 메모리 반도체 간담회를 열었다. 이 후보는 대선 출마 선언 직후에도 AI 반도체 설계 스타트업인 퓨리오사AI를 방문해 “AI 투자 100조원 시대를 열겠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 대선 최종 경선에 오른 김문수 후보와 한동훈 후보도 각각 100조원, 200조원을 동원해 AI산업을 진흥하겠다고 공약했다. 쏟아지는 공약만 보면 한국 AI산업은 걱정할 게 별로 없을 것 같지만, 과거를 되짚어 보면 AI 기업 대표의 씁쓸함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가 전 세계를 휩쓸던 2017년 19대 대선 때를 돌이켜보면, 홍준표 당시 자유한국당 후보는 새만금지역을 4차산업혁명특구로 조성하기 위해 20조원 규모의 재원을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민간 주도 4차산업혁명인재센터를 설립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후보도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해 정부 부처를 개편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놨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자신이 공약으로 내건 4차산업혁명위원회 설치를 실현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규제 완화나 산업 육성 등 업계에 굵직한 족적을 남기진 못했다. 5년 동안 지속된 이 위원회는 이후 2022년 윤석열 정부에서 디지털플랫폼정부위원회로 대체됐다. 문재인 정부에서 일했던 한 인사는 “개념 자체가 방대한 4차 산업혁명을 신생위원회가 주도하며 현안을 해결하는 데 어려운 측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라고 실토했다.
대선 주자들이 챗GPT만 바라보고 AI 소프트웨어 관련 공약만 내놓고 있는 게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제조업이 강한 한국의 특성을 고려하면 피지컬AI(물리적 기기에 적용되는 AI)를 강화하는 등 산업 현장에 맞춤화한 공약이 필요하다”며 “지금 수준의 공약으로는 AI산업 육성은 겉돌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AI 관련 공약이 공약(空約)으로 반복된다는 기시감이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