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미국발 관세 전쟁에다 글로벌 수요 둔화, 더 커진 환율 변동성까지…. 다음 분기 실적도 가늠하기 어려운데 작년에 낸 계획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공시하라니요.”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프로그램 도입 1년을 앞두고 상장사 공시 담당자들 사이에서 나오는 한탄이다. 행동주의 펀드를 비롯한 금융투자업계와 정부 일각에서 밸류업 이행 공시를 내라며 은근히 압박이 들어와서다. 밸류업은 애초 자율적으로 공시하는 방식이다. 2년 차부터 전년도 계획과 이행 결과를 자율 공시할 수 있지만 의무가 아니라 선택사항일 뿐이다.
작년 5월 말 시작한 밸류업 공시 프로그램엔 지난달 말까지 상장사 150여 곳이 참여했다. 단순히 자사주 소각과 배당 계획만 적어낸 게 아니다. 밸류업 공시엔 기업의 3년 이상 중장기 기업가치 목표와 도달 시점, 실행 방안 등이 모두 들어간다. 업황과 매출, 영업이익 등 주요 재무제표를 포함해서다.
계획대로 풀리면 좋겠지만 요즘 현실이 녹록지 않은 게 문제다. 글로벌 경기가 급격히 꺾이고 있어서다. 우선 미국발 관세 불확실성이 눈에 띄게 커졌다. 전기·전자, 자동차, 화학, 조선 등 주력 산업 대부분은 글로벌 수요와 교역 조건에 민감한 업종이다. 미국 정부가 관세나 쿼터제를 언급해도 한 해 계획을 다시 짜야 할 판이다. 일부 기업은 이미 비상 경영에 돌입했다. “밸류업도 좋지만 일단 생존하는 게 우선 아니냐”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상장사들이 밸류업 공시에 소극적인 또 다른 이유는 장기간 지지부진한 국내 증시 때문이다. 막대한 유보금을 쏟아부어 자사주를 매입·소각해도 주가가 크게 반응하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다. 경제 펀더멘털(기초체력)에 대한 의구심이 외국인 투자자를 중심으로 꾸준히 나오는 탓이다. 작년 말부터는 정치 리스크에 따른 불확실성까지 확대됐다. 밸류업 계획 공시를 내놓은 기업의 주주환원책이 지연되면 ‘말뿐이었다’라는 비판을 듣기 일쑤다. 주주환원책에도 주가가 뛰지 않으면 ‘곳간을 더 풀라’는 요구가 빗발친다. 밸류업 공시 자체가 기업엔 큰 부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금융당국은 이달 밸류업 우수기업 10여 곳을 선정할 계획이다. 이름이 오른 상장사엔 해외 투자설명회(IR)와 법인세 감면 컨설팅을 해주고, 거래소 상장부과금을 면제한다. 그나마 가장 큰 혜택인 상장부과금은 시가총액 10조원 기업 기준으로 연간 1600만원 정도다.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인센티브가 매우 작다는 얘기다. 별 실익이 없는 상황에서 추가 공시 압박만 계속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상장사들 사이에서 끊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