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는 인생 축소판…기본기 중요하고 흥분은 금물”[양종구의 100세 시대 건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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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경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52·한국학)는 중고교 시절 테니스 선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엘리트 선수로는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해 대학에 들어가서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 자연스럽게 테니스와 멀어졌다.

박진경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가 서울 구로구 고척동 귀뚜라미클린테니스코트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는 모습. 한동안 라켓을 잡지 않았던 그는 미국 유학 시절이던 2005년 부친의 사망 등으로 힘들 때 다시 테니스를 치며 희망을 찾았고, 이후 평생 건강 지킴이로 삼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박진경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가 서울 구로구 고척동 귀뚜라미클린테니스코트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는 모습. 한동안 라켓을 잡지 않았던 그는 미국 유학 시절이던 2005년 부친의 사망 등으로 힘들 때 다시 테니스를 치며 희망을 찾았고, 이후 평생 건강 지킴이로 삼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2005년 미국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암에 걸렸고, 몇 개월 새 돌아가셨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에 충격을 받아 논문도 잘 써지지 않았다. 불면증까지 왔다. 그때 지인이 테니스를 치자고 했다.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라켓을 휘두르며 공만 쫓아가다 보니 그 시간만은 아버지 죽음 등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잠도 잘 잤고, 다시 논문 쓰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박 교수는 그때부터 테니스를 그의 건강 지킴이이자 친구로 삼고 있다.

“한동안 테니스를 잊고 살았었어요. 중고교 시절 테니스 선수였고, 대학도 특기생으로 들어갔는데…. 선수 생활하며 어느 순간 ‘난 엘리트 선수로는 성공하지 못하겠다’라는 판단을 했어요. 그때부터 테니스를 등한시했죠.”

박 교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취미로 테니스를 시작했다. 아버지의 복식 파트너 역할도 했다. 그는 “테니스를 좋아하는 아버지께서 제가 테니스를 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복식 파트너로 삼았다”라고 했다. 박 교수는 언니 소개로 서울 진선여중에 테니스 선수로 입학했다. “제가 6학년 때 진선여중 2학년인 언니가 테니스 감독인 담임 선생님이 선수를 찾고 있다고 해 제게 테스트받을 것을 제안했다”고 했다.

박진경 교수가 서울 구로구 고척동 귀뚜라미클린테니스코트에서 포핸드 스트로크를 날리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박진경 교수가 서울 구로구 고척동 귀뚜라미클린테니스코트에서 포핸드 스트로크를 날리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막상 제가 테니스 선수를 한다고 하니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어요. 제가 공부도 잘했거든요. 제가 반 3등으로 들어갔는데 당시 담임 선생님이 어머니를 불러 ‘공부 잘하는 데 왜 운동을 시키냐?’고 했다고 해요. 그렇다 보니 부모님들은 반대할 수밖에 없었죠. 특히 저와 함께 테니스를 치던 아버지께서 더 심하게 반대했죠. 담임 선생님이 제게도 운동을 그만둘 것을 권했죠. 하지만 당시 제 귀엔 전혀 들어오지 않았죠. 테니스가 너무 좋고 재밌었거든요.”

반대를 무릅쓰고 테니스를 다시 시작했는데 중학교 2학년 1학기 때 라켓을 놓았다. 박 교수는 “아버지께서 ‘재능이 있다면 지금쯤 전국대회 4강은 가야 한다’며 운동을 그만두라고 했다. 당시 전 전국대회 16강, 8강 정도 갔었다. 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그만두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약 두 달 뒤에 다시 라켓을 잡았다. “테니스 생각만 났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늘 풀이 죽어 있던 박 교수를 본 어머니가 ‘그렇게 테니스가 좋으면 다시 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아버지께서도 ‘정말 하고 싶으면 해도 되는데 넌 능력이 안 된다. 나중에 부모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진선여고 2학년이 돼서야 “아버지 말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박진경 교수가 테니스를 치고 있다. 박진경 교수 제공.

박진경 교수가 테니스를 치고 있다. 박진경 교수 제공.
”아버지는 스포츠의 세계에서는 고만고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사실 스포츠에선 최고만 살아남잖아요. 그래서 저는 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한 뒤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죠. 운동을 잠시 놓았다 다시 시작할 때 어머니께서 ‘그래도 공부를 완전히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해 틈틈이 공부한 게 큰 힘이 됐어요.“

숙명여대 행정학과를 차석으로 졸업했다. 199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이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로 어려울 때였죠. 아버지는 유학을 반대했어요. 제가 장학금을 받는다고 해도 막무가내였죠. 그래서 제가 ‘그럼 한 학기만 도와달라’고 하고 비행기에 올랐어요. 어머니도 ‘한 학기만 하고 돌아오라’고 했죠. 열심히 살길을 찾았고, 두 번째 학기부터 장학금을 받았어요.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테니스 선수 경험 덕분에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스포츠 문화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문화를 더 광범위하게 연구하는 일리노이대 커뮤니케이션 학과로 옮겨 세계의 문화를 더 심도 있게 공부했다. 2008년 ‘육체 식민주의: 식민지 조선의 의학, 재생산, 그리고 인종’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운동선수 시절부터 인간의 몸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문화를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과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게 됐다”고 했다.

박진경 교수가 세계 메이저 테니스대회의 하나인 호주 오픈을 관전하다 포즈를 취했다. 박 교수는 2023년부터 2024년까지 호주국립대 한국학연구소 초빙교수로 있으면서 호주 오픈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박진경 교수 제공.

박진경 교수가 세계 메이저 테니스대회의 하나인 호주 오픈을 관전하다 포즈를 취했다. 박 교수는 2023년부터 2024년까지 호주국립대 한국학연구소 초빙교수로 있으면서 호주 오픈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박진경 교수 제공.
“대학 때부터 제가 테니스 선수론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사실상 테니스랑 이별을 선언했죠. 다른 길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컸어요. 테니스를 전혀 치지 않았어요. 그런데 유학하러 가서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데 테니스 수업을 해주면 좀 더 쉽게 받을 수 있었죠. 그래서 수업을 해주긴 했지만, 테니스에 열정적으로 매달리진 않았어요. 지인들이랑 따로 테니스를 치지는 않았거든요.”

박 교수가 박사 학위를 받을 때쯤 ‘한류’ 여파로 한국학이 붐을 이뤘다. “저도 귀국하기보다는 한국학으로 미국에서 교수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요. 그때 서던캘리포니아대 한국학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을 하게 됐죠. 당시 UC버클리대에서도 강의해달라고 했고, 운이 좋게도 캐나다 토론토대에서 한국학은 아니지만 아시아 여성 연구하는 사람을 교수로 뽑는다는 겁니다. 조건이 아시아 언어를 2개 이상 하고 여성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이었죠. 지원서를 냈는데 됐습니다.”

박 교수는 서던캘리포니아대에서 박사후연구원을 1년 했고, 캐나다 토론토대에서 조교수로 4년 강의한 뒤 2013년 한국외국어대에 둥지를 틀었다. 귀국 초기엔 한국에 다시 적응하느라 테니스를 제대로 치지 못했다. 동호회 위주로 운영되다 보니 테니스코트 확보도 쉽지 않았다. 지인들과 간간이 어울려 치다 2019년쯤 김문일 전 테니스 국가대표 감독(78·현우서비스 대표)이 운영하는 효천클럽을 알게 됐고,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박 교수는 주 2~3회 테니스를 치고 있다. 테니스를 잘 치기 위해 근육운동과 달리기도 하고 있다.

박진경 교수가 서울 구로구 고척동 귀뚜라미클린테니스코트에서 서비스를 날리려 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박진경 교수가 서울 구로구 고척동 귀뚜라미클린테니스코트에서 서비스를 날리려 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테니스가 겉으로 보기엔 화려해 보이지만 제일 중요한 게 체력과 뛰는 겁니다. 뭐든 기본이 잘돼 있어야 합니다. 테니스도,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기에 충실하면 중간 이상은 합니다. 유학 시절 테니스가 절 살렸다고 생각해요. 라켓으로 공을 치다 보면 온갖 스트레스가 날아가요. 재충전되는 느낌이랄까. 회원들과 어우러져 치는 것 그 자체로도 너무 재밌어요. 체력이 좋아져 연구에 집중도 잘 되죠. 제 또래에선 제가 체력이 가장 좋아요. 이런 테니스를 이젠 평생 절대 놓을 수 없죠.”

박 교수에게 이제 테니스는 삶 그 자체가 됐다. 그는 “학생들로부터 제가 테니스에 비유해서 설명을 많이 한다는 말을 듣는다”고 했다. “테니스는 인생의 축소판 같아요. 순발력도 필요하고, 지구력도 필요하죠. 공격해야 할 때도 있고, 수비적으로 나가야 할 때도 있죠. 경기하면서 상대방을 계속 분석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흥분하지 않도록 자신을 컨트롤하기도 해야 하죠. 테니스를 통해 정말 많은 것을 배웁니다.”

박 교수는 이렇게 테니스를 치며 연구에 더 집중했다. 내년 9월엔 하버드대 출판부를 통해 영문 서적도 출간한다. 그는 “박사 학위를 모태로 한 책”이라고 했다. 책 제목은 ‘Bodies for Empire: Biomedicine, Race and Women’s Disease in Colonial Korea(제국의 몸: 식민지 조선의 의학, 인종, 그리고 부인병)’이다. 박 교수는 “박사 학위 논문 쓸 때처럼 테니스 치면서 영문 서적 출간 스트레스를 이겨냈다”며 활짝 웃었다.

박진경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가 서울 구로구 고척동 귀뚜라미클린테니스코트에서  라켓과 공을 들고 밝게 웃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박진경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가 서울 구로구 고척동 귀뚜라미클린테니스코트에서 라켓과 공을 들고 밝게 웃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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