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는 채소인가, 과일인가. 이 질문에 초등학생들도 당연히 답을 할 정도로 토마토가 채소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토마토는 정말 채소이고, 처음부터도 당연히 채소였을까?
채소와 과일을 나누는 기준은 정말 다양하다. 나무에서 자라는지 풀에서 자라는가, 열매로 열리는지 줄기나 뿌리에 해당하는지, 안에 씨가 있는지 없는지, 1년생인지 다년생인지, 당도는 어느 정도인지 등 여러 기준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토마토는 적용 기준에 따라 과일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도, 채소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도 해서 헷갈리기 마련이다. 혹자들은 토마토가 식물학적으로는 과일이고 원예학적으로는 채소라고도 하는데, 식물학에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그 기준이 어떻게 다른지도 잘 모르겠다. 학명을 찾아보니 '쌍떡잎식물강 박목 박과'에 해당한다는데, 수박은 과일이고 호박은 채소이다 보니 '박'이 채소인지 과일인지도 혼란스럽다.
그런데도 우리가 현재 별다른 이견 없이 토마토를 과일이 아닌 채소로 분류하고 있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그렇게 판결했기 때문이다.
연방대법원이 그런 것까지 고민해야 하나,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판결이 나올 당시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19세기 미국은 자국 농업의 보호를 위해 과일을 면세품으로 지정하는 대신 채소에는 10%의 관세를 부과했다. 19세기 말부터 토마토 수요가 늘면서 미국은 부족한 공급을 채우기 위해 유럽으로부터 상당량의 토마토를 수입했는데, 처음에는 이를 과일로 분류해 관세를 부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입량이 점점 증가하며 미국 농가에 타격이 심해지자 돌연 채소로 분류해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토마토 수입상들은 토마토가 과일이라고 주장하며 1887년 관세 환급 소송(Nix vs. Hedden case)을 제기했고, 토마토가 채소인지 과일인지의 문제는 치열한 법정 싸움으로 이어졌다.
1893년 미 연방대법원은 "토마토는 열매를 먹는 것이므로 식물학적으로는 과일이지만, 식후가 아닌 식사 중에 먹는 것이므로 채소라고 봐야 한다"는, 논리적으로 다소 궁색한 정책적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 이후로 학술 논쟁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토마토가 채소라는 사실에 이견을 달기 힘들어지게 됐다.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 역시 부가가치세법에 토마토를 채소로 분류하고 있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만일 필자처럼 식사 후에만 토마토를 먹는 사람이 연방대법관을 했다면, 위 판결과 달리 지금 토마토를 과일이라고 분류하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비슷한 사례는 또 있다. 돌연변이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마블의 영화 '엑스맨'(X-Men) 시리즈에 나오는 엑스맨은 사람일까, 아닐까.
마블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엑스맨 시리즈가 공전의 히트를 치자 마블 자회사인 토이비즈는 중국에 공장을 세우고 엑스맨 인형을 제작한 뒤 미국으로 수입해 판매했다. 당시 미 관세법은 사람이 아닌 동물이나 캐릭터 형상의 장난감에는 6.8%의 관세를 적용하는 데 비해 사람 인형에는 그 두 배 가까운 12%의 관세를 적용하고 있었다. 그러자 토이비즈는 1997년 미국 과세 관청을 상대로 "엑스맨은 슈렉이나 킹콩처럼 머리와 팔다리는 있지만 사람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관세 환급소송(Toy Biz, Inc vs. United States case)을 제기했다. 6년간의 치열한 공방을 거쳐 마침내 미 국제무역법원은 2003년 "동물의 발톱과 인공 팔다리를 가졌으니 사람이 아니다(nonhuman creatures)"라고 최종 판결했다. 그 결과 낮아진 관세로 인형 판매에 따른 수익성은 좋아졌지만, 엑스맨이 사람이 아니라는 판결에 분노한 마블 팬들이 마블 관련 제품 전체를 보이콧해 한동안 홍역을 치러야 했다.
필자가 만일 이런 사건들의 담당 판사였다면 어땠을까. 토마토를 잔뜩 쌓아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토마토를 씹고 있지는 않았을까. 엑스맨 인형을 어린 아들에게 들이밀며 이 인형이 사람으로 보이냐며 묻지는 않았을까.
흔히 법조인을 법조문만 달달 외워 적용하는 직업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는 언제라도 검색하면 나오는 법조문을 굳이 외우고 다니는 법조인은 거의 없다. 정작 법률 업무를 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법조문의 해석 부분이다. 여기서 비(非)법조인과 훈련받은 법조인, 상식이 건전하고 통찰력이 뛰어난 법조인과 그렇지 않은 법조인의 능력 차이가 비로소 나타난다. 토마토나 엑스맨 사건처럼 돈과 법이 얽히고설키면 법조문의 해석 결과에 따라 경제적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갈리기도 한다.
현재 지급되는 임금은 통상임금인지 아닌지, 가상자산은 금융상품인지 아닌지 등 우리 일상에선 경제적 이해 관계가 얽힌 법 해석과 선 나누기가 끊임없이 필요하다. 그 결과에 따라 토마토가 채소가 되기도 하고, 엑스맨이 동물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법은 우리 삶과 가까이 있고 늘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 필자가 판사이던 시절 내렸던 판결도 이 사회에 미미하게나마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지금 변호사로서 쓰고 있는 의견서 역시 조금이라도 세상을 변화시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격무에 찌든 법조인들이 그나마 평생 자랑삼을 수 있는 가장 큰 보람이 아닐까.
하태헌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 | 서울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병원에서 전문의 과정을 수료한 후 공중보건의사로 근무하던 중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판사로 임관해 대법원 재판연구관(부장판사), 서울고등법원 고법판사 등 법원 주요 요직을 거쳤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로스쿨(LL.M)에서 미국회사법을 공부했고, 의료인 출신이면서 부장판사 경력을 가진 국내 유일의 변호사다. 의료인 출신 법관으로서의 전문성을 살려 법무법인 세종에서 주요 민·형사 송무, 기업 분쟁, 금융 분쟁, 가상자산, 제약·바이오 사건 등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