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부디 이번 무대가 (당신들과의) 마지막 순간이 아니길 바랍니다(Gentlemen, I hope this was not the last time).”
1990년 6월 체코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불멸의 지휘 거장’ 레너드 번스타인은 세상을 떠나기 넉 달 전에 오른 이 무대에서 힘겹게 지휘를 마친 뒤 이렇게 말했다. 공연이 끝나면 인공호흡기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한 상태였지만, 미국에서 한걸음에 달려올 만큼 그에게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는 각별했다. 1946년 당시 미국에서 온 신예 지휘자에 불과하던 그에게 선뜻 유럽 데뷔 기회를 열어준 자리이자, 1948년 공산주의자들의 집권으로 한동안 돌아올 수 없었던 무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번스타인은 유럽 활동의 시작과 끝을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에 새겼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념해 1946년 창설된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과 더불어 유럽을 대표하는 명문 클래식 음악제다. 마에스트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부터 바이올리니스트 다비트 오이스트라흐·예후디 메뉴인, 피아니스트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까지…. 이제는 별이 된 대가들이 수없이 많은 명연(名演)을 탄생시킨 음악제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더욱 특별했다.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가 80주년을 맞은 해라서다. 체코 작곡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서거일인 5월 12일 시작해 6월 3일까지 이어진 축제 현장은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에서 건너온 수많은 인파로 연일 북적였다. 체코를 대표하는 공연장 오베츠니 둠(시민회관), 루돌피눔을 중심으로 교향악, 실내악, 오페라를 아우르는 46개 콘서트가 마련됐고, 객석 점유율은 95%를 기록했다. 사실상 전체 매진. 총 티켓 판매액은 3620만코루나(약 22억7600만원)로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음악에 대한 열기와 희열로 가득했던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를 주최 측과 체코 관광청의 초청을 받아 국내 언론사 단독으로 다녀왔다.
유럽 넘어 美 심포니도 찾은 '프라하의 봄'…"세계 문화예술 허브가 목표"
[파벨 트로얀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감독 인터뷰]
올해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의 대흥행은 일찍부터 점쳐졌다. 지난달 12일 스메타나의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이 연주된 오프닝 콘서트에는 페트르 파벨 체코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 정·관·재계 인사가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형형색색의 드레스와 턱시도를 갖춰 입은 청중이 공연장을 가득 채웠고, 티켓을 구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선 루돌피눔 체츠 야외 공연장 앞에 마련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콘서트가 생중계됐다. 이 때문에 카를교, 프라하성, 블타바강의 황홀한 야경을 배경 삼아 콘크리트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이 마음껏 환호하며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영화 같은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등 내로라하는 유럽 명문 악단과 오랜 인연을 이어온 이 축제엔 올해 ‘미국 5대 오케스트라’(빅 파이브)로 불리는 새로운 손님들도 찾아왔다.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안드리스 넬손스가 이끄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BSO)는 쇼스타코비치 서거 50주기를 기리기 위해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교향곡 11번 ‘1905년’을 연주하며 청중의 뜨거운 환호성을 자아냈다. 네덜란드 출신 거장 얍 판 츠베덴이 지휘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CSO)는 체코 태생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6번 ‘비극적’을 탁월한 해석으로 풀어내 기립박수를 끌어냈다. BSO, CSO가 프라하의 봄 축제를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달 30일 체코 프라하 아리아 호텔에서 파벨 트로얀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 감독(41·사진)을 만났다. 바쁜 일정에도 지친 기색 없이 환히 웃으며 먼저 악수를 청한 그는 “프라하의 봄 80년 역사를 돌아보는 건 우리에게 무거운 책임이자 도전이었다”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된 국제적인 행사인 만큼 유럽뿐 아니라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 오케스트라까지 대거 참여하고, 함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큰 상징성을 가질 것으로 확신했다”고 말했다. 이어 “다양한 예술적 대화를 중시한 축제 창립자 겸 지휘자 라파엘 쿠벨리크의 정신을 이어받아 수년간 꿈꿔온 일들이 실현돼 기쁘다”고 덧붙였다.
2022년 8월 임기를 시작한 트로얀은 축제 외연 확대와 콘텐츠 강화를 빠르게 이끌고 있는 혁신적 리더다. 2023년엔 팝스타 같은 인기를 구가하는 천재 지휘자 클라우스 메켈레의 데뷔 무대를 성사시켰고, 지난해엔 최정상급 악단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이끄는 오프닝 콘서트를 최초로 기획해 유럽 전역의 주목을 받았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프로젝트 ‘스프링 틴’을 신설하고, 현대음악 프로그램 전문화를 주도한 것도 그의 성과다. 트로얀은 “프라하의 봄은 체코가 어려움을 겪던 시기 다른 나라와 소통하도록 하는 유일한 창구였다”며 “우리의 사명은 프라하의 봄이 세계 문화예술의 허브로 발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프라하=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