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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만의 최대 적자
“매우 슬프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결정입니다.”5월 13일 일본 요코하마 본사에서 열린 기자회견. 이반 에스피노사 닛산자동차 사장이 대규모 구조조정을 발표합니다. 생산시설 7곳을 폐쇄하고(17곳→10곳), 총 2만명 인력(전체 직원의 15%)을 감축한다는 계획이죠. 지난해 무려 6709억엔(6조4000억원)의 엄청난 순손실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판매 부진에서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데, 돈은 바닥났고, 부채 만기는 다가오는 상황. 혼다와 추진했던 합병 계획은 올해 2월 무산됐죠. 일단 허리띠를 졸라매며 버텨야 하는데, 새로운 구명줄을 잡지 않는 한 위태롭습니다. 에스피노사 대표는 새로운 파트너십(=돈줄) 체결과 관련해 이렇게 말합니다.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비슷한 멜로디가 반복되는 건 우연일까요. 언뜻 보면 지금 닛산의 위기는 경영 실책+외부 환경의 변화(트럼프 관세 등) 탓으로 보이지만요. 닛산자동차 역사를 좀 더 길게 보면, 이건 결국 닛산의 폐습 내지 고질병과 맥이 닿아있습니다. 극심한 파벌 갈등이 그것이죠.
천황으로 불리던 노조위원장
1933년 설립된 닛산자동차. 아유카와 요스케가 세운 재벌그룹 일본산업(닛산)의 자회사였죠. 전후 아유카와는 A급 전범 혐의로 투옥된 뒤, 경영에서 손을 뗐고요. 이후 닛산자동차는 주인 없이 월급쟁이 사장이 경영하는 기업으로 커갔습니다.하지만 주인이 없을 뿐이지 주인 행세하는 권력자가 없는 건 아니었죠. 1960~70년대 이 기업엔 ‘닛산의 천황’으로 불리던 독재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닛산의 회장도, 사장도, 심지어 임원도 아니었죠. 닛산의 노조위원장(자동차노련 회장) 시오지 이치로(塩路一郎)였습니다.시오지 이치로가 대학 졸업 뒤 닛산에 입사한 건 1953년. 당시 닛산 노동조합은 ‘전국 최강 노조’라 할 정도로 초강성이었죠. 시오지는 입사하자마자 가와마타 가쓰지(川又克二) 당시 사장과 손잡고 어용노조인 ‘신노조’를 결성해 이 좌파 노조 파괴에 일조합니다. 이후 신노조는 가와마타 사장과 밀월관계를 이어갔죠.
이 시기 닛산은 도요타에 이은 일본 자동차 업계 2위 기업으로 잘 나갔습니다. 프린스자동차의 우수한 엔지니어를 영입하면서 ‘기술의 닛산’이란 별칭도 얻었고요. 하지만 분명 노조의 경영 관여는 정상적이지 않았습니다. 생산성 저하의 큰 원인으로 지목됐죠. 자연히 이에 대항한 반대파가 고개를 들게 됩니다.
1977년 취임한 이시하라 슌(石原俊) 사장은 ‘글로벌 10’ 전략을 발표합니다. 세계 시장 점유율 10% 달성 목표를 위해 미국과 영국에 생산 거점을 대폭 늘리겠단 야심 찬 계획이었죠. 국내 고용 타격을 우려한 시오지 위원장은 이에 “파업을 불사한다”고 으름장 놓으며 강하게 반발합니다. 조직이 회장파(가와마타 회장+시오지 위원장)와 사장파(이시하라 사장)로 완전히 쪼개졌고요. 둘 사이 극한 대립이 이어집니다.
파벌 갈등이 극에 달했던 1984년. 한 주간지에 시오지 위원장의 여성스캔들 기사가 게재됩니다. 호화요트에서 내연녀와 밀회를 즐기는 사진이 실렸죠. 이 사진을 찍은 건 시오지의 사생활을 캐온 닛산 홍보부 직원. 이를 계기로 현장 직원의 신망을 잃은 시오지는 급격히 힘이 빠졌고요. 결국 1986년 물러납니다. 이시하라 사장이 굳건했던 시오지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겁니다. 정면 대결이 아닌 권모술수를 이용해서 말이죠.라이벌과 함께 제거된 ‘닷선’
이시하라 사장에겐 또 다른 눈엣가시가 있었습니다. 1975년 미국시장에서 닛산은 수입차 1위에 올랐는데요. 닛산의 브랜드인 ‘닷선(Datsun)‘의 대성공 때문이었죠. 미국에 처음 진출한 1960년부터 섬세한 서비스로 닷선 브랜드를 성장시킨 주인공은 바로 가타야마 유카타(片山豊) 미국 닛산 사장. 경영능력과 인품 면에서 큰 존경을 받았던 인물로, ‘Z의 아버지’로도 불렸는데요(1969년 출시된 스포츠카 ‘페이레이디Z’를 기획).하지만 이시하라 사장은 취임하자마자 가타야마를 귀국시킵니다. 압도적인 성과를 올리는 가타야마를 라이벌로 의식했기 때문이죠. 이어 1982년 가타야마가 애써 키워놓은 닷선 브랜드마저 없애고 닛산으로 통일합니다. 미국에선 닷선이 훨씬 더 인지도가 높았는데도 말이죠.
1999년 닛산이 끌어안고 있던 부채는 무려 2조엔. 그해 6844억엔이라는 역사상 최대 적자를 기록합니다. 닛산은 진짜로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죠. 그 닛산을 구한 건 르노의 자본 제휴(36.8%)였습니다. 그리고 르노로부터 닛산 재건의 임무를 부여받고 투입된 사람이 바로 카를로스 곤이었죠.
‘곤의 매직’과 쿠데타
1999년 닛산에 온 카를로스 곤은 ‘닛산 리바이벌 플랜’을 발표합니다. 5개 국내공장 폐쇄, 노동자 2만1000명 감축, 하청기업 50% 감축 등. 정말 혹독한 구조조정이었죠. 그리고 놀랍게도 닛산은 이를 통해 V자형으로 빠르게 부활합니다. 전 세계가 ‘곤의 마법’이라며 칭송했는데요.사실 카를로스 곤의 경영방식에 대해선 다양한 평가가 나옵니다. 일본인이라면 차마 할 수 없는 과감한 칼질로 죽어가던 닛산을 기적적으로 되살린 건 분명하고요. 2010년 세계 최초의 양산형 전기차 ‘리프’를 출시하며 전기차 기술 혁신에도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재무제표 숫자에만 집착해 장기 성장성을 훼손했단 비판도 많죠. 원가 절감과 매출 확대에 너무 몰두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차량 품질과 브랜드 이미지를 떨어뜨렸다는 건데요. 이 점에선 제너럴일렉트릭(GE)의 전설적인 CEO 잭 웰치와 비슷하단 평가도 받습니다.
문제는 독재체제가 너무 길어지면서 점점 카를로스 곤의 장악력에도 그늘이 생겼단 겁니다. 닛산과 르노, 두 기업 회장을 겸임하며 바빠진 뒤로 곤은 닛산의 돌아가는 상황을 세세하게 들여다보진 못했고요. 임원들은 회장에게 보고하기 좋게 ‘겉보기 숫자를 만드는’ 일에만 연연하게 됩니다. 자기네 부서 수치를 돋보이게 하느라 다른 부서 뒷다리를 잡는 일이 반복됐죠. 다시 조직엔 분열이 싹텄고, 본업보단 사내 정치가 중요해집니다.
그리고 2018년 11월, 상층부의 균열이 예기치 못한 극단적인 형태로 터져 나옵니다. 카를로스 곤 회장이 도쿄지방검찰청에 의해 전격 체포된 겁니다. 혐의는 금융상품거래법 위반. 자신의 보수를 축소 신고하고, 회사 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해서 해외에 부동산을 샀다는 건데요. 닛산의 내부 고발이 검찰을 움직였습니다.
고발자는 금세 드러났죠. 체포 당일 밤 사이카와 히로토(西川廣人) 닛산 사장이 단독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중대한 부정행위”라고 발표합니다. 곤이 아끼던 ‘곤 칠드런’ 대표주자가 일으킨 쿠데타였습니다.
분열로 길 잃은 경영
카를로스 곤 회장 체포는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빅뉴스였습니다. 일본과 프랑스, 양국 정부까지 수습을 위해 나서야 했죠. 무엇보다 이 사건이 더욱 극적인 건 보석상태였던 카를로스 곤이 2019년 12월 일본에서 몰래 탈출했단 점입니다. 악기 케이스에 몸을 숨긴 채 개인 제트기를 타고 일본을 떠났죠. 그는 지금도 레바논에서 지냅니다. 지난해 말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의 닛산엔 비전이 없다”고 일갈했을 정도로 건재하죠.그럼 카를로스 곤의 독재체제가 무너진 뒤, 닛산의 경영은 어떻게 됐을까요. 답은 숫자로 알 수 있죠. 2024년 글로벌 판매대수는 334만대. 정점이었던 2017년 577만대와 비교하면 42%나 급감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를 하나 꼽자면 이겁니다. 한층 극심해진 파벌 경쟁에 매몰돼있기 때문이죠. 일단 애초에 유능한 사람이 리더가 되는 구조가 아니고요. 누가 리더가 되든 끌어내리려고 기회를 엿보죠. 다들 자기가 올라설 수 있다고 기대하니까요. 이래서는 어떤 결속도, 추진력도 기대할 수 없죠. 대신 내부 스파이질과 언론 플레이가 판을 치는데요.
카를로스 곤에 대한 쿠데타 성공으로 권력을 잡았던 사이카와 히로토 사장. 하지만 본인 역시 곤처럼 보수를 편법으로 축소신고했던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쫓겨나듯 그만둬야 했죠. 누군가 일부러 언론에 내부 정보를 흘린 겁니다.
이제 닛산의 자력갱생은 쉽지 않아 보이고요. 또다시 외부에서 구세주를 찾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언론에선 오랜 인연(악연 포함)으로 얽힌 르노, 한번 협상이 엎어진 혼다, 러브콜 보내는 대만 폭스콘 등을 거론하는데요. 아마도 자존심 강한 닛산이 확 숙이고 들어가야 할 겁니다. 화려한 부활의 상징이었던 닛산의 추락. 아마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겁니다. By.딥다이브
닛산을 추락시킨 파벌 싸움을 두고 마치 한국 정치를 보는 듯하다는 블로그 글이 있더군요. 사실 저도 그런 생각이 들던 참이었는데요. 그래도 한번 부활에 성공했던 닛산이니 두 번째 부활도 가능하려나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일본 대표 자동차 제조사 닛산자동차가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습니다. 직원 2만명을 감축하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예고했죠. 적자와 경영위기, 그리고 외부 수혈 모색. 1999년의 상황이 되풀이됩니다.
-왜 닛산에선 경영위기가 반복될까요. 많은 이들이 닛산의 고질병 같은 파벌갈등을 지적합니다. 주인 없는 회사 닛산은 수십년 전부터 권력을 잡기 위한 사내 파벌싸움이 극심했고, 상대를 끌어내리기 위한 내부 스파이질과 언론플레이가 판을 쳤습니다.
-강력한 독재자 카를로스 곤은 사라졌지만 조직은 더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글로벌 무대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할 기업이 사내 정치에 에너지를 쏟고 있으니 산으로 가고 있죠. ‘기술의 닛산’이란 그 명성이 무색해졌습니다.
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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