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오스만제국(현재의 튀르키예)엔 맛있는 음식이라면 껌뻑 죽는 술탄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매 끼니 새로운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급기야 왕궁의 요리사를 불러놓고는 엄명을 내렸다. “이제부터 같은 음식을 또 내놓으면 네 놈의 목을 치겠노라.” 맙소사,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그날부터 요리사는 두려움에 떨며 쉴 새 없이 신메뉴 개발에 돌입해야 했고, 덕분에 오늘날 튀르키예 요리가 이렇게나 다양해졌단다.
믿거나 말거나 식의 출처 불분명한 설이라지만,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해 종종 인용한다. 나 역시 하루 종일 음식 생각만 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여행지를 꼽을 때도 맛있는 것이 다양한 지역이 먼저 떠오른다. 보통은 그런 곳이 역사도 길고 볼거리도 많기 마련이니까. 튀르키예는 나에게 언제나 1순위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이 넓은 땅의 동서남북과 중부까지 두루 여행했지만 여전히 또 가고 싶은 곳이다.
그런데 막상 튀르키예에서 제일 자주 먹는 음식은 다름 아닌 빵, 평범하고 슴슴한 에크멕(ekmek)이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우리의 공깃밥 같은 에크멕. 편의상 바게트와 비교하자면, 우선 길이는 35~40센티미터로 일반적인 바게트의 2/3쯤 된다. 두께는 바게트의 2배가량. 껍질은 얇고 파삭하며 별로 질기지 않은 편이고, 속살은 바게트처럼 구멍이 숭숭 나 있지 않다. 부드럽고 쫄깃하다. 반죽할 때 소금과 올리브유를 조금 넣긴 하지만 빵에서 딱히 짠맛과 기름기가 느껴지진 않는다. 사워도우 빵처럼 시큼하지도 않다. 그저 덤덤하고 구수한데, 이게 뭐라고 끝없이 들어간다.
이 두루뭉술한 미스터리의 빵을 튀르키예 사람들은 매 식사 때마다 곁들인다. 식당에 들어와 자리 잡고 앉으면 음식을 주문하기도 전에 당연하다는 듯 에크멕 바구니부터 가져다준다. 혹은 아예 테이블 위에 큼직한 빵 보관용 통을 놔두곤 알아서 꺼내 먹으라고 한다. 어느 쪽이든 공짜이고, 바구니가 비면 곧 채워준다.
나는 종종 설렁탕집에서 탕이 나오기 전에 김치랑 깍두기만으로 공깃밥을 거의 다 비워버리곤 하는데, 튀르키예에선 에크멕 맛이나 좀 볼까 하며 한 조각 집었다가 어느새 한 바구니를 먹어 치우는 짓을 한다. 그래 놓고는 배가 불러 정작 주요리는 반도 채 먹지 못하는 것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튀르키예에서도 새는 모양이다. 하지만 맛있는 걸 어떡해.
에크멕과 더불어 식사할 때 가장 흔하게 곁들이는 빵은 틀나클르 피데(tırnaklı pide)로, 줄여서 피데라고도 부른다. 약 1~2센티미터 두께의 도톰하고 쫄깃한 빵으로 마치 쟁반마냥 둥글넓적하다. 보통 지름 30센티미터 정도지만 빵집마다 크기와 모양이 다르다. 나는 길이 70센티미터가 넘는 피데를 몇 개 사서 둘둘 말아서 한국에 가져온 적도 있다. 아아, 맛있었다.
하여간 피데는 이렇게 큼직하니, 보통은 손바닥만 하게 잘라서 내어준다. 슴슴하고 부드러운 맛의 에크멕과 비교하자면 피데 쪽이 좀 더 고소하고 쫀득하고 살짝 불맛도 난다. 인도의 난(नान, naan)과도 비슷한 풍미다. 이러면 안 되지만, 한 조각만 더 먹어야지.
이왕이면 갓 구운 빵에 도전해 보자. 튀르키예와 한국의 시차는 6시간이라, 여행 초반 며칠은 적응하느라 해롱해롱한다. 어차피 일찍 눈이 떠질 테니 숙소 주변을 탐색해 보는 거다. 구글 지도에서 프른(fırın)을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프른은 빵집 또는 화덕을 뜻한다. 근처에 오둔 프른(odun fırın)이 있으면 금상첨화다. 오둔은 장작이니, 장작불로 빵을 굽는 곳인 거다. 요런 곳에선 으레 입구에 장작을 이만큼씩 쌓아두고 쓴다.
빵집의 문을 살살 밀고 들어가니 빵집 사장님이 마치 아는 사람인 양 반겨준다. 심지어 오븐까지 열어 보여주기까지 한다. 수년간 튀르키예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친절한 사람을 참 많이 만났다. 느긋하고 너그럽게, 음식과 문화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사람들. 이젠 휴대폰의 번역기 앱 덕분에 대화를 이어가는 게 별로 어렵지 않다. 고마운 기술이다.
빵집 벽에는 에크멕 250g당 가격이 표시된 종이가 붙어있다. 가게에서 정한 게 아니라 정부에서 관리하는 가격이다. 튀르키예의 주식인 밀 가격은 선거의 주요 공약으로 등장하고, 에크멕 가격 역시 함부로 올렸다간 여론이 엄청나게 나빠진다나. 하긴, 우리도 식당 공깃밥 가격에 예민하긴 마찬가지다. 누구나 마음속에 공깃밥 가격의 마지노선이 있기 마련이다. 김밥 한 줄, 짜장면 한 그릇 가격처럼. 그렇게 생각하니 저 종이의 무게가 확 와닿는다.
사장님 덕분에 빵 반죽하는 모습이며 오븐까지 실컷 구경하고, 갓 나온 빵도 좀 샀다. 종류가 워낙 다양한데, 뭐가 좋을까?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 시미트(simit)를 골랐다. 어른 손바닥을 꽉 채우는 큼직한 고리 모양의 빵이다. 진한 갈색 표면엔 참깨가 잔뜩, 아주 잔뜩 붙어있다. 에크멕은 그저 아주 오래전부터 먹었다는 식으로 그 유래가 좀 두루뭉술한 데 비해 시미트는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다. 무려 1525년에 쓰인 이스탄불 행정기관 공문서에 따르면 시미트라는 빵이 등장하자마자 아주 빠르게 유행했으며, 품질 관리를 위해 아예 나라에서 재료와 제조법, 무게 등을 규격화해 전국에 배포했다고 한다. 어지간히 난리였나 보다.
하긴, 소비량만 놓고 보면 에크멕 쪽이 단연 우세겠지만, 정작 유명한 건 시미트 쪽인 것 같다. 거리의 노점이며 지하철역 입구 매점, 관광지 주변 등 사람이 모이는 곳엔 으레 시미트도 있으니 말이다. 특히 커다란 나무판자나 쟁반에 시미트를 탑처럼 쌓아 올려 머리에 얹고 다니는 상인을 볼 때면 ‘와, 내가 정말로 튀르키예에 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이 나라의 상징이랄까. 에크멕은 공깃밥 같은 존재니만큼 그것만 들고 다니며 뜯어먹게 되진 않는 데 비해 시미트는 빵 자체의 간이 좀 더 삼삼하고, 반죽에 올리브유도 꽤 넉넉히 들어가 훨씬 고소하다. 반죽을 둥근 고리 모양으로 만든 후 포도즙을 졸여서 당밀 같은 상태로 만든 페크메즈(pekmez)에 담갔다 빼서 참깨를 잔뜩 붙여 구우니 한층 더 맛깔난다. 밥이라기보단 간식인 셈이다.
시미트를 파는 패스트푸드 체인도 있는데, 기본 형태의 시미트는 물론이고 요걸 반으로 갈라 치즈와 토마토를 끼우거나 버터와 잼, 초콜릿 스프레드 등을 듬뿍 바른 샌드위치도 판다. 그러니 입이 심심하다 싶으면 크게 고민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시미트로 손을 뻗게 된다. 이처럼 마음만 먹으면 금세 먹을 수 있지만, 이른 아침 빵집에서 갓 나온 따끈한 걸 한 번이라도 맛본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괜히 먹었다며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맛을 봐버렸으니, 이젠 차게 식은 시미트엔 절대 만족하지 못할 테니까.
빵이 주식이자 생명인 튀르키예엔 공공성을 띤 빵집 체인도 있다. 할크 에크멕(halk ekmek), 번역하자면 ‘모두의 빵’ 내지는 ‘공공의 빵’이다. 이스탄불과 앙카라 등 여러 도시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비영리 빵집으로, 시중 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공장제 빵과 쿠키, 파스타 등을 판다. 1977년에 설립되어 50년 가까이 이어진 튀르키예의 대표적 복지 사업으로 꼽힌다. 주로 지하철역 주변, 시장, 광장 등 유동 인구가 많은 곳에 매장이 있다. 빵집이라기보단 신문과 잡지 가판대 정도 크기이고, 작은 창구 앞에 줄 서서 빵을 구매한다.
문득 여행 가계부 앱을 열어 6년 전의 튀르키예 여행 기록과 현재의 물가를 비교하니 입에서 '아이고' 소리가 나온다. 짭짤한 페이스트리와 홍차 한 잔에 8리라이던 게 245리라가 되었으니, 대체 몇 배나 오른 것인지. 분명 지금도 실시간으로 오르고 있을 것이다.
시내 곳곳엔 역시 시에서 운영하는 공공 식당인 켄트 로칸타스(kent lokantası)가 있다. 빵과 수프, 주요리와 디저트로 구성된 실속 있는 식사를 물가 대비 아주 저렴하게 판매하는데, 점심때만 운영하는 데다 재료가 소진되면 문을 닫기 때문에 일찍부터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린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한 달가량 머문 위스퀴다르 항구 앞 광장에선 이른 아침이면 무료 수프를 배급한다. 따뜻하고 걸쭉한 렌틸콩 수프 한 그릇과 자그마한 빵 한 개(물론 할크 에크멕 제품). 출근길의 노동자와 학생, 고령의 연금 생활자가 주로 이용한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아침 한 끼라도 따뜻하게 제공한다는 취지로 시작된 복지 사업이 벌써 몇 년째 이어지는 중이다. 명절이나 선거철엔 시장이 직접 수프를 나눠준다나.
다들 벤치에 둘러앉거나 선 채로 수프를 후룩후룩 마신다. 마침, 빵집에서 산 시미트가 절반쯤 남아 있어 나 역시 벤치에 끼어 앉아 우물우물 뜯어먹으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에게 인사를 건네며 수프를 덜어주겠다고 나선다.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 갓 구운 빵 같은 온기를 나누는 사람들이다.

2 week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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