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 끝에서 피어난 자매의 무한한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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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 끝에서 피어난 자매의 무한한 상상력

벨기에를 대표하는 비르투오소이자 작곡가 외젠 이자이는 젊은 연주자들이 현대음악까지 범위를 넓혀 기술은 물론 예술적인 숙련도까지 겨룰 수 있는 콩쿠르를 꿈꿨다. 그는 발표되지 않은 작품을 선정해 경연에 참여한 연주자가 고유의 해석을 선보일 수 있기를 바랐다.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왕비는 이 뜻을 이어받아 1937년 제1회 이자이 콩쿠르를 개최했다. 대회에는 전 세계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몰려들었고, 걸출한 연주자들을 제치고 소련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가 1등 상을 거머쥐었다. 이듬해 피아노 부문으로 연이어 콩쿠르가 열렸지만, 혼란스러운 정세와 퀸 엘리자베스 음악재단의 내홍으로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대회가 열리지 못했다. 그러던 1951년 재단은 퀸엘리자베스 콩쿠르로 이름을 바뀌어 재개했고, 음악가들에게 가장 영예로우면서도 난도가 높은 경연대회로 자리 잡았다.

첼리스트 최하영은 2022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결선 지정곡으로 요르그 비드만의 미발표곡을 연주했고, 자유곡으로 비톨드 루토스와프스키 협주곡을 선택해 브뤼셀 필하모닉과 협연했다. 청중과 심사위원은 물론 현지 유력지 르 수아르(LE SOIR)까지 최하영의 “과감한 선곡과 환상적인 연주”를 극찬했다. 최하영은 인터뷰를 통해 결선 지정곡이 “난제와도 같았다”고 했지만, “연주 내내 음악 축제에 참여한 기분”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최하영에 이어 동생 최송하는 2024년 샬롯 브레이, 에프렘 짐발리스트의 곡으로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결선에 오르며 주목을 받았고, 쇼스타코비치 협주곡과 지정곡 티에리 에스카이쉬의 미공개 작품을 연주하며 경연을 마무리했다.

활 끝에서 피어난 자매의 무한한 상상력

두 자매는 콩쿠르 밖에서도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이며 외연을 넓혀왔다. 최하영은 한 인터뷰에서 연주 실력 외에도 "상상력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 공을 들인다"고 밝히기도 했다. 공연을 앞두고 진행된 인터뷰에서는 서로의 연주가 ‘순발력’과 ‘즉흥성’에서 강점을 보인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공연에서 둘은 상상력을 다해 자신들의 강점을 명확히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비톨르 루토스와프스키의 무반주 첼로를 위한 자허 변주곡은 그 시작에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이었다. 최하영은 이 곡을 통해 첼로가 노래하며 울부짖고, 날아다닐 수 있다고 알려줬다. 3분 남짓한 시간동안 첼로는 미세한 떨림과 커다란 함성을 오가며 연주회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진 연주는 바로크 시대로 시계를 되돌렸다. 최하영은 첼로와 활을 바꿔 들어 사뿐하고 산뜻하게 도메니코 가브리엘리의 리체르카르 5번을 연주했다. 연주는 자칫 들뜰 수 있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저음과 고음을 오갔다. 리체르카르 6번 연주에서도 섬세함보다는 리듬감을 강조하며 곡의 매력을 살렸다.

첼로의 몸체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로 시작한 펜테레츠키의 지그프리트 팜을 위한 카프리치오 연주는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나 다름없었다. 최하영은 첼로에서 낼 수 있는 모든 울림을 확인하듯 악기의 끝과 끝을 오가며 연주했는데, 그 울림이 달라짐에 따라 수 개의 얼굴을 가진 배우처럼 극적인 표정 연기도 선보였다. 가면을 바꿔쓰듯 변하는 표정에 따라 다음에 나올 음표를 기대하게 만드는 순간이 이어졌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문이 스르르 열리기도 하고 때로는 바람이 휘몰아쳤다. 최하영은 마치 손동작도 악보에 그려진 듯 무용수가 되어 손을 휘저었다. 활은 마침내 테일피스를 그어내 오묘한 떨림을 만들었고,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스릴러 같은 연주가 막을 내렸다.

무사히 연극이 끝난 것에 환호하듯 다시 악기를 바꿔 시작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연주는 환희에 가득찼다. 프렐류드에서 보여준 보잉 테크닉은 그가 왜 뛰어난 연주자인지를 보여줬으며, 강약을 미묘하게 조절해 가며 보여준 우아한 알라망드와 쿠랑트에선 유려한 몸짓의 무용이 펼쳐졌다. 최하영은 몸이 완전히 풀린 듯 느린 악장인 사라방드에 이르러서는 고요 속에 퍼지는 절제되고 우아한 울림으로 몰입을 이끌었다. 장조와 단조의 대비를 잘 살린 부레 악장을 넘어서 지그에 다다랐을때 공연장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찼다. 음표를 섬세하게 매만지며 숭고함을 더하기보다, 곡에 담긴 기쁨을 관객과 나누고자 하는 열정이 돋보인 무대였다.

활 끝에서 피어난 자매의 무한한 상상력

인터미션을 지나 바이올리니스트 최송하와 함께 무대에 오른 최하영은 풍성한 울림으로 모차르트의 이중주 G장조 연주를 시작했다. 전반부 연주로 지쳤을 첼리스트를 위해 1악장에서는 최송하가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연주를 리드했다. 두 사람은 약간의 긴장감을 조성하기도 하며 악기로 유쾌한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는데, 2악장에서는 한결 편안해진 첼로의 반주가 1악장과 다르게 바이올린을 리드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했다. 완벽하게 호흡이 조율된 3악장에서 두 연주자는 하나 된 듯 음표 위를 질주했다. 절정에 이른 연주가 마지막 음표를 연주하자 객석에서는 얕은 탄식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시대를 넘나드는 무대의 끝은 졸탄 코다이의 이중주가 장식했다. 두 연주자는 빛이 나는 소리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한 느낌의 1악장을 펼쳐나갔다. 이제 막 꽃을 피운 젊은 비르투오소의 적극적인 표현력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2악장에서는 두 자매의 표현력이 최고조에 이르며 악장 특유의 질감을 우아하게 드러냈다. 헝가리 춤곡에서 모티브를 얻은 마지막 악장에서는 두 자매만이 보여줄 수 있는 호흡으로 경쾌하고 날이 선 무도가 펼쳐졌다.

활을 두고 등장한 앙코르 무대에서 두 자매는 현을 손가락으로 뜯으며 CPE바흐의 프레스토 C단조를 연주했다. 바로크와 현대음악을 넘나드는, 공들여 마련한 프로그램의 마지막에 가장 어울리는 우아한 선곡이었다.

조원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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