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정전으로 혼돈에 빠진 스페인과 포르투갈 주요 도시들의 풍경이다. 전기가 꺼진 사회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비행기가 안 떠 발이 묶인 관광객들은 호텔을 예약하려 해도 스마트폰이 먹통이라 머물 곳을 찾지 못했다. 이동 수단이 자가용뿐이어서 주유소는 기름을 채우려는 차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도로변에는 목적지를 적은 종이를 흔드는 히치하이커들이 길게 늘어섰다.
▷스페인에서 15GW의 전력 발전량이 갑자기 손실된 게 정전의 발단이다. 스페인 하루 발전량의 60%에 달하는 양이다. 스페인과 전력망을 공유하는 포르투갈도 덩달아 피해를 봤다. 전력 손실의 정확한 원인은 아직 조사 중이다. 스페인은 태양광과 풍력을 통한 전력 생산 비중이 50%가 넘는데 재생에너지 확대 속도에 맞게 전력망과 저장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게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일부 지역 전력망이 복구되곤 있지만 완전 복구까진 일주일 넘게 걸릴 것이라고 한다.
▷유럽 서남부의 이베리아반도를 멈춰 세운 이번 정전은 21세기의 국가도 단번에 19세기로 후퇴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전기가 없으면 병원 수술실과 중환자실이 문을 닫고, 수도 가스 등 기본 인프라가 무력화된다. 운송망이 끊기는 건 한 나라의 혈액순환이 멎는 것과 같다. 정유공장도 돌릴 수 없어 이 상태가 며칠 더 이어지면 연료가 바닥난 차들이 하나둘 길가에 버려지고, 텅 빈 거리만 남게 된다. 정부가 재난 정보를 알리려 해도 인터넷과 TV가 먹통이라 조그만 휴대용 라디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사이 불안한 사람들 틈새로 괴소문이나 가짜 정보가 스며든다.▷우리에겐 당연해 보이는 일상이 있다. 스위치만 누르면 켜지는 불, 언제든 열리는 인터넷, 시간표에 맞춰 도착하는 지하철, 카드를 긁으면 들려오는 결제 완료음…. 이 모든 것은 전기가 끊기는 순간 곧바로 사라진다. 스마트폰 없인 하루도 버티기 힘들 만큼 ‘연결 사회’가 된 지금은 전기에 더 깊이 의존하고 있다. 갈수록 활용도가 커지는 인공지능(AI)도 전기를 엄청나게 먹는다. 우리의 문명이 깨지기 쉬운 얇은 껍질 위에 아슬아슬 얹혀 있다는 걸 이번 스페인 대정전이 일깨워준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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