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리치오 폴리니, 마르타 아르헤리치,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전설적인 피아노 거장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세계 최고 피아노 경연 대회로 불리는 쇼팽 콩쿠르 우승을 계기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음악가들이란 것. 5년 주기로 열리는 데다 눈에 띄게 두각을 드러내는 참가자가 없을 시 1위 자체를 호명하지 않는 엄격한 대회다. ‘쇼팽 콩쿠르 우승자’란 타이틀은 천재적인 실력을 갖춘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명패(名牌)와도 같다.
중국계 캐나다 피아니스트 브루스 리우(28)는 2021년 쇼팽 콩쿠르 정상에 오른 연주자다. 그의 성장세는 가파르다. 콩쿠르 직후 세계 굴지의 음반사 도이치그라모폰(DG)과 독점 계약을 맺었고, 지난해에는 오푸스 클래식이 선정한 ‘올해의 젊은 예술가’에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독일 라인가우 뮤직 페스티벌에서 ‘포커스 아티스트’로 발탁한 피아니스트도 바로 그였다. 리우가 2023년 이후 2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차이콥스키, 스크랴빈, 프로코피예프 등 오직 러시아 작곡가의 작품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들고서다.
지난 11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그가 처음 선보인 작품은 차이콥스키의 ‘사계(12곡)’. 리우는 1부와 2부에 여섯 곡씩 나눠서 연주했는데, 내내 건반을 누르는 깊이와 무게, 속도, 페달 움직임, 피아노의 배음과 잔향 효과를 예민하게 조율하며 12곡의 각기 다른 성격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1곡 ‘화롯가에서’를 연주할 때에는 온몸에 힘을 빼고 오로지 손끝의 감각만을 이용했다. 따뜻한 음색을 불러내는 도입부와 모든 음을 하나의 줄로 꿰어내는 듯한 긴밀한 진행으로 몽환적인 악상을 그려냈다. 2곡 ‘축제’에선 명료한 터치와 깔끔한 리듬 표현으로 쾌활한 이미지를 전면에 펼쳐냈다.
차이콥스키 특유의 애수가 아로새겨진 6곡 ‘뱃노래’로 넘어가자, 리우는 마치 얇은 천을 쌓아 올리듯 섬세하게 진행되는 셈여림 변화와 음 사이사이에 공간을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지독한 비애의 악상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10곡 ‘가을의 노래’에선 건반을 지그시 눌러 치면서 수분을 가득 머금은 독보적인 음색을 불러냈는데, 이는 차이콥스키가 평생 시달린 깊은 고독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한 심리적 효과까지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해석에 따라 전진해야 할 때와 숨을 골라야 할 때를 정확히 구분해서 표현했고, 조금의 과장도 허용하지 않았다. 세부의 기교적 악구들을 명료하게 처리하면서도 긴 호흡으로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그의 연주는 차이콥스키가 써낸 구조적 아름다움을 전달하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이날 함께 연주된 스크랴빈의 피아노 소나타 4번에선 부서지는 햇살을 묘사한 듯한 신비로운 음색, 뚜렷한 방향성과 강한 추진력으로 작품 본연의 오묘한 분위기와 역동감을 동시에 불러냈다. 마지막 작품은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7번. 그는 건반을 짧게 내려치는 순간적인 힘으로 파괴적인 악상을 전면에 드러냈다. 독소전쟁 중 작품을 완성할 수밖에 없었던 작곡가의 비극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연상하게 하는 날카로운 고음과 비극 속으로 침잠하듯 무게감 있는 저음의 대비,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대단한 응집력과 음향적 입체감을 만들어내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3악장에선 온·오프 스위치를 번갈아 누른 것처럼 순식간에 소리의 강약과 표현의 완급이 바뀌는 연주를 선보이면서 변화무쌍한 작품의 매력을 생동감 있게 전달했다.
피아노로 내내 팽팽한 긴장감과 강렬한 생명력을 선사한 그가 마지막 건반을 내려치고 손을 떼자, 2000여 명의 청중은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과 뜨거운 박수 세례로 호응했다. 열한 번의 커튼콜, 네 번의 앙코르를 지낸 뒤에도 사람들은 좀처럼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음악에 대한 나의 접근 방식은 변화무쌍한 바다와 같다.” 리우가 2023년 앨범 ‘파도’를 세상에 내놓으며 남긴 말이다. 이 표현처럼 리우의 음악은 무한한 상상력을 보여주면서도 작곡가의 의도나 언어를 조금도 해치지 않았고, 젊은 연주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생기와 활기를 자유롭게 표현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의 또 다른 변화가 기다려질 만한 무대였다. 때론 날아오르는 새처럼, 때론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처럼 돌아올 그의 음악을.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