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발레의 전설, 러시아 안무가 유리 니콜라예비치 그리고로비치가 19일(현지시간) 타계했다. 향년 98세. 그가 예술감독을 역임했던 볼쇼이 극장은 "20세기 후반 발레계의 핵심 인물이었던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별세했다"며 "그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의 귀중한 유산을 지켜나가겠다"고 발표했다. 그의 커리어가 시작된 마린스키 극장 역시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며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리고로비치는 1927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발레학교를 졸업한 뒤 키로프 발레단(현 마린스키 발레단)의 솔리스트로 입단한다. 이곳에서 1957년 첫 안무작인 '석화(The Stone Flower)'를 발표하며 새로운 천재의 등장이라는 호평을 이끌어낸다. 1961년 그리고로비치는 두번째 작품인 '사랑의 전설(The Legend Of Love)'을 발표해 성공을 거두고 1962년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 마스터가 된다.
그리고로비치의 발레는 러시아 발레계의 새로운 물결을 주도하게 된다. 1964년 서른일곱의 나이에 모스크바 볼쇼이 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발탁돼 1995년까지 31년동안 재직했다. 황실 발레단으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마린스키 발레단과 달리 신생 발레단이었던 볼쇼이 발레단은 이 기간 융성기를 맞이한다.
그리고로비치 재직 당시 볼쇼이 발레단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무용가들이 몰려들었고 90회가 넘는 순회 공연을 통해 인지도와 명성을 누렸다. 1995년 무용수 계약문제를 둘러싼 극장 경영진과 갈등 끝에 사임했는데, 이는 볼쇼이 200년 역사상 최초의 무용수 파업으로 이어질 정도로 무용수들의 깊은 존경을 받았다. 이후 2008년 볼쇼이 발레단으로 복귀해 안무가이자 발레마스터로 다시 활동했다. 그는 '소련 인민예술가'를 비롯해 러시아 최고 권위의 상을 휩쓸었다. 2017년에는 90세 생일을 기념해 볼쇼이 극장이 두달간 특별 공연을 열며 그의 업적을 기리기도 했다.
그리고로비치는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국립발레단과 교류하며 국립발레단을 비약적으로 성장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20여년간 한국 발레에 상당한 족적을 남겼으며 당시 무용수들도 그를 따뜻한 마스터 '유리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도 고령이었던 그는 '라 바야데르',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 여러 작품을 직접 지도하며 국립발레단 무대에 올렸고 '스파르타쿠스'의 공연으로 무용 스타들을 대거 배출해냈다. 스파르타쿠스에서 박진감 넘치는 발레리노들의 춤과 동작을 부각시켜 여성 중심이 아닌 극의 구성을 한국에 거의 처음 보여줬다. 당시 국립발레단장을 맡았던 최태지 단장은 "그리고로비치가 훌륭한 레퍼토리를 국립발레단에서 제한없이 무대에 올리도록 허락했던 결과 한국 발레가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의 안무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동작의 발레가, 결국은 인간의 예술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주지한다. 휴머니즘과 재치, 매우 사실적으로 다뤄지는 비극 등이 그의 장기다. '호두까기 인형'(1966)에서는 소품으로만 표현되던 1막의 호두까기 인형을 어린이 무용수로 바꿔 안무를 부여했다. '라 바야데르'(1991)에서는 남자 주인공 솔로르가 연인이 눈앞에서 죽었을 때 줄행랑을 치는 나약한 모습을 드러낸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13년까지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무대에 섰던 김주원은 "그리고로비치 선생님이 '발레는 젊음의 예술이다, 한정적인 시간에 마음껏 즐기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회상했다. 비슷한 기간 김주원과 함께 발레계 프리마 돈나 시대를 열었던 김지영은 개인 SNS에 그리고로비치와 함께 했던 사진을 게시하고 "영광이었고 감사했다"고 애도했다.
이해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