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머리가 벗겨지고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저씨 선수’는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큐를 높이 들어 올린 뒤 마치 아이처럼 펄쩍 뛰었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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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진(오른쪽)이 프로당구 PBA에서 감격의 첫 우승을 이룬 뒤 아내 안애란씨와 입을 맞추고 있다. 사진=PB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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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트로피를 앞에 둔 채 포즈를 취하는 이승진. 사진=PBA |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순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소감 외에는 어떤 표현도 나오지 않았다. 20여 년 넘게 당구대 위에서 보냈던 기다림이 비로소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주인공은 55세 나이에 프로당구 PBA 첫 우승을 이룬 이승진(55)이었다.
이승진은 지난 8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 PBA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5~26시즌 프로당구 4차 투어 ‘SY 베리테옴므 PBA-LPBA 챔피언십’ PBA(남자부) 결승서 최성원(48)을 세트스코어 4-1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2019년 PBA 출범 첫 대회부터 참가한 원년멤버인 이승진은 7년 만에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올 시즌 앞선 세 차례 대회를 모두 외국인선수가 휩쓴 상황에서 국내 선수로서 시즌 첫 우승이라는 의미 있는 기록도 세웠다.
이승진은 일반 팬들에게 낯선 이름이다. 당구선수로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낸 적도 없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친구를 따라 우연히 당구장을 찾은 이후 40년 가까이 큐를 놓은 적이 없었다. 공이 부딪히고, 회전하면서, 곡선을 그리다가, 다른 공을 맞추는 그 순간의 쾌감을 포기할 수 없었다.
취미로 즐기던 당구가 인생의 목표로 바뀐 계기는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이었다. 이승진은 “선수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마침 아시안게임에 당구 종목이 생겼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국가대표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서른 즈음에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당구로 벌어 먹고산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실업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쥐꼬리만 한 상금으로 생활하는 것은 말도 안 됐다. 2009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면서 더 무거운 현실을 접해야 했다.
이승진은 “아내에게 ‘1년만 더 선수 생활을 해보겠다’고 약속했고 아내도 흔쾌히 받아들였다”며 “하지만 선수를 하면 할수록 나갈수록 빚이 쌓였다. 몇 차례 입상해 상금도 받았지만 비용이 몇 배 더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먹고 살기 위해 당구장을 운영했다. 당구장에서 24시간 머물렀지만 정작 본인은 좋아하는 당구를 제대로 치지 못했다. 몇 년간 운영하던 당구장을 정리하고 다시 큐를 잡았다. 그는 “공을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고 말했다.
프로당구 출범 후 몇 년 동안 우승은 커녕 8강에도 들지 못했다. 그래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유명한 선수들과 함께 좋아하는 당구를 계속 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이승진은 “지금도 당구가 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젊은 선수들 플레이를 보며 물어보고, 부족한 점을 고쳐간다”며 “늘 배우려는 마음이 지금까지 나를 지켜준 힘이다”고 강조했다.
그런 겸손함은 늦깎이 정상 등극의 원동력이 됐다. 대구에서 당구클럽 매니저를 겸하고 있는 이승진은 자신만의 루틴을 지킨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개인 운동을 하고, 당구장이 오픈하기 전에 혼자 연습을 한다. 당구장 문을 열면 동호인들과 함께 실전 연습을 한 뒤 오후 6~7시쯤 퇴근한다. 그런 생활을 10년 넘게 매일 해왔다.
사실 이번 우승은 운도 따랐다. 결승전 5세트에서 2-10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행운의 뱅크샷 득점이 나왔다. 이 행운을 발판삼아 역전에 성공했고, 우승까지 이어졌다. 누구도 그것을 단순히 ‘운’이라 말하진 않았다. 긴 세월 포기하지 않고 버텼던 한 사람의 집념이 키운 열매였다.
이승진은 이번 우승으로 상금 1억원을 벌었다. 당수 선수 인생에서 벌어본 가장 큰 금액이다. 그에게 진짜 소중한 것은 경기 후 쏟아진 동료의 응원과 축하였다.
이승진은 “우승을 차지한 뒤 많은 후배 선수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며 “특히 ‘선배님이 우리의 희망이 되셨습니다’라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털어놓았다.
이승진에게 ‘또 우승할 수 있을까’라고 다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그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또 할 수 있을까요. 아마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나는 그저 당구가 좋아요. 큐를 잡는 순간이 가장 즐겁습니다. 대구에서 KTX를 타고 킨텍스(경기장)로 오는 순간도 너무나 설레고 행복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