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롭고 부족한 것 없는 유토피아에서 노동은 필요할까. 낙원을 꿈꿔 왔던 인류의 역사 안에서는 대체로 그렇다. 유토피아의 원형을 제시한 토머스 모어는 모든 시민이 하루 6시간만 일하고 재화를 나눠 갖는 공동 소유의 사회를 꿈꿨다. 공산주의 낙원을 꿈꾼 카를 마르크스도 직업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노동하는 사회를 그렸다. 하지만 초지능 인공지능(AI)이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유토피아에서, 인간은 노동 대신 어떤 조건을 버팀목 삼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닉 보스트롬 영국 옥스퍼드대 철학과 교수가 쓴 ‘딥 유토피아’는 인간의 지능을 아득히 뛰어넘는 초지능 AI 개발 이후 펼쳐질 ‘노동 없는 세상’을 가정하고, 유토피아와 같은 미래 사회에서 살아갈 포스트휴먼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과 동시에 정치, 경제, 과학, 철학을 넘나들며 유토피아에서 살아갈 인간의 조건은 무엇인지 묻는다.
책에 따르면 ‘딥 유토피아’는 대체로 초지능 AI에 힘입은 기술 발전으로 노동할 필요가 없이 안전하고 풍요의 상태에 놓인 인류의 모습을 전제로 한다. 공학, 의학 등 과학기술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정도로 발달된 ‘기술적 성숙 단계’이며, 따라서 인간은 어떤식으로든 AI 로봇을 능가하지 못한다.
노동을 할 필요가 없으니 인간은 다른 의미 있는 일을 하면 될까. 이 문제도 간단치 않다. 책은 쇼핑, 운동, 학습, 육아를 예시로 든다. AI가 쇼핑을 자동화하고, 뇌과학과 의학을 통해 실제 행위 없이도 운동과 학습의 효과를 누리며, 부모의 모습과 똑같은 AI 로봇이 아이의 발달 단계에 맞춰 완벽히 육아를 수행해낸다. 그렇다면 인류는 무엇을 의미와 목적으로 삼아야 할까. 저자는 스스로 노력해 만족을 얻고, 로봇보다 사람의 관심을 받기 원하는 인류의 본성을 제시하며 딥 유토피아에서도 인류가 삶의 의미와 목적 문제에서 견딜 수 있다고 내다본다.
저자는 인간의 본성을 이유로 딥 유토피아의 지속가능성에도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호승심을 갖고 권력욕을 추구하는 인간 앞에서 기술은 취약하다. 가령 치안에 필요한 폭동 진압 기술, 범죄를 예방하는 감시·통신 기술은 부패한 정치 권력과 범죄조직에 악용될 수 있다. 이는 일국의 문제를 넘어 전 지구적 이슈로 커질 수도 있다. 국가 간 기술 역량이 균질하지 않다고 가정하면, 패권국이 압도적 군사 기술을 동원해 다른 국가를 침략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우리 문명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방식에 발전이 없다면, 물질적인 힘이 증가했을 때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악화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적 조건이 달성되었다고 해도 상황은 불안정하고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자가 일주일간 대학에서 강의를 진행하는 콘셉트로 구성된 책은 ‘포스트휴먼’과 딥 유토피아에 대한 명확하고 구체적인 초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유토피아와 인간을 규정하는 명제와 조건을 제시하고 반박을 거듭함으로써, 현 문명과 인간의 빛과 그림자를 거울처럼 들여다보게 한다. 인간의 욕망은 의미와 목적, 쾌락, 성취감 등에 걸쳐 복잡하게 산개해 있으며, 단일한 유토피아를 상상할 만큼 현재의 문명이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포스트휴먼 시대에도 변하지 않을 ‘인류’의 조건은 무엇일지. 과연 인류는 스스로 딥 유토피아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원제는 ‘DEEP UTOPIA : Life and Meaning in a solved world’.
닉 보스트롬 지음, 김의석 옮김, 까치글방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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