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 제190호 협약, 직장내 괴롭힘법 업그레이드 기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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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 제190호 협약, 직장내 괴롭힘법 업그레이드 기회로

이재명 정부가 국정과제로 제시한 ILO 제190호 협약(폭력 및 괴롭힘 방지 협약) 비준은 우리 사회가 직장 내 폭력과 괴롭힘 문제를 어떻게 제도적으로 해결할지 가늠하는 중요한 분수령이다. 노동계가 오랫동안 요구해온 과제이자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흐름 속에서, 이번 비준은 한국 노동정책의 방향성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ILO 제190호 협약의 의미

ILO 제190호 협약은 2019년 국제노동총회에서 채택된 가장 최신의 국제 규범으로, 그 뿌리는 1944년 필라델피아 선언에 있다. 필라델피아 선언이 인간 존엄을 노동의 핵심 가치로 주창했다면, 협약은 이를 구체화해 폭력과 괴롭힘을 인권침해 또는 남용으로 규정한다. 협약(제1조)은 폭력과 괴롭힘을 '용납할 수 없는 일련의 행동과 관행, 또는 그 위협'으로 정의하며, 단 한 번의 사건이라도 괴롭힘이 될 수 있다고 명시한다. 신체적·심리적·성적·경제적 피해를 모두 포함하며, 가해자의 의도나 지위 여부와 무관하게 피해자 중심 접근을 택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에 따라 직장 내 상하관계 뿐 아니라 동료 간, 고객·환자·승객 등 제3자에 의한 괴롭힘도 규율 대상에 포함된다. 협약은 회원국이 예방-보호-집행-구제-지침-교육-인식 제고를 아우르는 포괄적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특히 제9조는 사용자의 통제 범위 내에서 합리적으로 실행 가능한 조치를 법제화하도록 하고, △근로자와 대표자의 참여에 기반한 정책 수립 △위험 진단과 예방조치 시행 △폭력·괴롭힘을 산업안전보건의 심리사회적 위험으로 고려하는 체계를 강조한다.

◆한국 법제도의 현주소와 평가

우리 사회에는 “한국의 노동기준은 선진국에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이 있지만, 직장 내 괴롭힘 관련 법제를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이미 한국은 강제근로 금지, 아동노동 근절, 성차별·성희롱 규제 등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 특히 2019년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 아시아 최초로 직장 내 괴롭힘을 법제화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근로기준법 제23조는 정당한 이유 없는 불이익 처우를 금지하고 있으며, 제76조의2 이하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 정의, 사용자의 조치 의무, 불이익 처우 금지를 규정한다. 또한 남녀고용평등법은 1인 이상 사업장에도 성희롱 금지와 예방조치를 의무화하고, 노동조합법은 부당노동행위를 금지해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한다. ILO 협약 가이드라인 역시 한국의 법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 정의 규정, 피해자 산재보상 인정, 불이익 처우에 대한 형사처벌 제도가 최근 입법 사례로 소개된 것이다. 이는 한국 법체계가 협약 취지와 상당 부분 부합한다는 증거다.

◆비준 위한 보완 과제와 사회적 대화

물론 협약 비준을 위해 보완할 부분도 존재한다. ‘직장 내’라는 공간적 범위 제한, ‘우위성’을 요건으로 한 정의 규정은 플랫폼 노동자·프리랜서 등 비정형 노동자를 충분히 포섭하지 못한다. 보호 대상의 확대, 예방 중심 접근 등 협약이 요구하는 세부 요소와의 간극도 일부 남아 있다. 그러나 ILO는 협약국의 법체계와 관행을 존중하고, 사용자의 통제 범위를 고려해 각국이 합리적이고 실행 가능한 방식으로 제도를 설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즉, 한국은 이미 협약의 기본 취지에 상당히 부합하는 법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앞으로 사회적 대화와 제도적 보완을 통해 비준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 다만 2019년 법 제정 과정에서 충분한 사회적 협의가 부족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갑질’에 대한 국민적 공분 속에서 전격적으로 법이 통과되었고, 그 결과 현장에서 갈등이 심화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제는 가해자 처벌 중심에서 벗어나, 피해자 보호와 예방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노동계의 일방적 요구, 경영계의 방어적 태도, 정부의 국제 기준 충족 여부만을 의식한 대응 방식으로는 더 이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존엄한 일터로 나아가기 위하여

ILO 제190호 협약의 비준은 단순히 국제 의무를 이행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이는 한국이 직장 내 폭력과 괴롭힘 문제를 예방 중심의 산업안전·보건 체계로 전환하고, 피해자 보호와 분쟁 해결 절차를 내실화할 수 있는 기회다. 이재명 정부가 정책과제로 제시한 이번 비준을 계기로, 우리는 이미 협약 취지에 부합하는 제도적 성과를 기반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나가야 한다. 나아가 노사정이 존중 일터 구축 사례와 경험을 적극 공유하고, 이를 제도 개선에 반영하는 진정성 있는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그 결실로 한국의 일터가 단순히 갈등을 관리하는 수준을 넘어, 모든 구성원이 존엄과 존중 속에서 협력하며 일할 수 있는 진정한 존엄의 일터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문강분 행복한일연구소·노무법인 대표 / 한국괴롭힘학회 수석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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