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눈망울의 ‘멜로’가 V자를 그리며 눈을 찡긋 감는다. 야자수 ‘룰루’는 유영하듯 헤엄친다. 미 캘리포니아 LA 출신의 사이키델릭 팝 아티스트 스티븐 해링턴 (46)이 올해 프리즈 뉴욕 2025에서 LG전자와 협업해 선보인 미디어아트 작품의 일부다. 이 작품 일부는 이탈리아 하이엔드 가구 브랜드 Kartell의 뉴욕 플래그십 매장 안에서도 전시됐다.
'환각을 일으킨다'는 뜻의 사이키델릭(psychedelic)이란 단어처럼 그를 규정하는 밝고 화사한 색채와 캐릭터는 전 세계에 팬덤을 갖고 있다. 유니클로, 나이키, 크록스, 이케아 등의 글로벌 브랜드는 물론 켄드릭 라마 등 여러 아티스트와도 협업했다. 그의 캐릭터들은 비좁은 골목길에 위트와 리듬을 주기도 하고, 때로 기후 위기에 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도 한다.
회화, 조각, 드로잉 등 매체를 넘나들던 그가 미디어 아트를 시도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28년 LA올림픽의 로고와 캐릭터 제작을 맡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를 프리즈 뉴욕 현장에서 만났다.
▶미디어아트 작업은 처음이다. 프로젝트를 마친 소감이 궁금하다.
새로운 매체로 작업할 때는 항상 새로운 장애물에 직면하지만, 이번 프로젝트의 결과는 매우 보람 있었다. LG전자 팀과 협업하며 전통적인 그림이 기술과 결합할 때 어떻게 특별해지는 지 깨달았다. 그 동안 만들어온 캐릭터들이 살아움직이는 느낌이 놀라웠다.
▶가장 도전적이었던 점은 무엇인가.
팝 아티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나의 작업은 항상 종이에 연필로 시작한다.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유기적이고 직관적인 과정을 즐기는데,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흥미를 느낀다. 이번 작업에서 가장 큰 과제는 LG전자의 투명 올레드 TV를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2D 공간에서 작업하는 데 익숙한 나에게 ‘조형적인 부분’을 먼저 생각하도록 했다. 빛, 색상, 형태 등 3D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으면서도 2D 공간 안에서 작업해야 하는 과정이 무척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룰루와 멜로 등 당신의 캐릭터에 생명이 생긴 것 같다.
지난해 서도호 작가의 작품, 존 아캄프라의 미디어 작업을 보면서 놀라웠던 점이 많았다. 새로운 기술을 탐구하고 실험할 수 있는 최초의 미국 아티스트 중 한 명이 된 것은 영광이었다.
▶타 장르, 아티스와 협업에 적극적인 데다 공공미술의 영역에서도 독보적이다. 아티스트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계속 전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원하든 원치 않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예술을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 아닐까. 이 시대의 예술은 우리를 하나의 사회로 묶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예술은 인간으로서 우리를 연결해주는 마지막 남은 것 중 하나고, 가능한 한 열정적이고 직관적으로 예술을 계속해내가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들이다.
▶LA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신이 나고 자란 도시는 어떤 영감을 주나.
LA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LA가 가진 색을 사랑한다. 모든 것이 햇빛에 의해 표백되어 있는데, LA 사람들은 그 색채에 대해 두려움이 없다. 빛바랜 건물과 자동차에서 볼 수 있는 ‘거의 형광빛 파스텔’에 가까운 중간 어딘가의 색상을 좋아한다. 예를 들어 연한 바다 녹색, 연어 주황색, 탄 라일락 보라색…. LA는 기본적으로 해변의 사막이고 1년 내내 온화하고 따듯한 기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나의 작품에 이 색이 스며들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지울 수 없는 정체성 같은 것이다.
▶이번에 작업한 7개의 작품 중 마음 속에 더 특별한 작품이 있나.
‘꽃향기를 맡으러 멈춰서’ 시리즈를 재작업하는 것이 정말 흥미로웠다. 원래 이 시리즈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 그렸다. 당연히 모든 것이 너무 어둡고 우울하고 정말 무거웠다. 당시 동네와 지역 협곡 등을 주로 산책했는데, 그때 LA의 모든 야생화와 아름다운 색채가 떠올랐다. 이 그림 시리즈는 “주변의 소박한 것들을 멈추고 즐기라”는 의미로 만들었다. 우리 모두가 매일 경험하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온전히 즐기라는 의미였다. 이 시리즈가 움직이는 형태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된 것은 마음에 큰 울림이 됐다.
▶당신의 수 많은 캐릭터는 어떻게 탄생했나.
룰루, 멜로 등의 캐릭터는 수년에 걸쳐 개발됐다. 원래 그래픽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았는데, 몇 년이 지나 돌이켜보니 내가 매우 특정한 백인 남성과 여성의 캐릭터를 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뻔하디 뻔한, 히피 캐릭터를 그리는 경향이 있었다. 종교, 인종, 민족, 심지어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었고, 그렇게 주인공 멜로가 탄생했다. 멜로의 움직임은 거의 통통 튀는 유형인데, 멜로는 내가 기분 좋을 때 움직이는 모습과 표현한 것이나 다름 없다. 뉴욕=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