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더 검소하다고? 강남에도 여러 계층이 산다
그런데 이런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공용 사우나에 비치된 샴푸를 훔쳐 간다. 샴푸통을 통째로 가져가거나, 빈 통을 가져와 샴푸를 덜어 간다. 이런 얌체 짓 때문에 한 달 비품 값만 몇백만 원이 들고 있고, 그래서 결국 샴푸·린스 등 공용품을 비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차라리 가난한 사람이 이러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아파트는 가장 작은 평형도 20억 원은 넘게 나간다. 이런 데 사는 사람들이 샴푸 값을 아끼려고 공용 사우나에 비치된 샴푸를 가져가는 건 웃기지 않나. “부자는 검소하구나” “부자는 이런 것도 아끼는구나” “이렇게 절약해야 부자가 되는구나”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테다. 하지만 진짜 부자가 그럴 리는 없다. 그럼 왜 이처럼 비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할까. 그건 그들이 재산은 많을지 몰라도 부자로서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재산은 많지만 돈은 없는 생활을 해왔기 때문이다.
강남을 가로지르는 테헤란로, 봉은사로, 학동로 등을 지나면 좌우로 빌딩이 늘어서 있다. 특히 테헤란로는 한국을 대표하는 고층 건물 지역이다. 주변을 보면 고급 아파트도 많다. 이렇게 큰길로만 다니면 강남은 부자 동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로를 벗어나 블록 내부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 빌딩 첫 뒷길에는 음식점과 상가들이 나오지만 거기서 더 안으로 들어가면 낡은 다가구주택, 빌라가 즐비하다. 서울에서 개발되지 않은 다가구주택 밀집지와 별 차이가 없다.
강남 최고 중심지라는 테헤란로에서 많이 떨어져야 이런 집들이 나오는 게 아니다. 테헤란로를 끼고 있는 블록에도 이런 다세대 빌라 마을이 있다. 사람들은 강남에 이런 주거지역이 많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빌라를 찾는 사람은 아예 강남에 오지 않지만 사실, 이런 다세대 빌라 월세는 그리 비싸지 않다.
강남구에만 약 24만5000가구가 산다. 그런데 강남 아파트는 11만 가구가 좀 넘는다. 나머지 가구는 아파트가 아니라 빌라, 다가구주택, 다세대주택, 오피스텔 등에 살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은 주거 세입자다. 실제로 강남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반 이상이 부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강남에 살아요”라는 말에 잘산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아파트에 산다고 모두 부자인 것도 아니다. 강남 아파트 주민들도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최근 강남 아파트에 거주하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부자로 봐도 된다. 하지만 강남에 산 지 오래됐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비싼 아파트에 살긴 하지만 돈은 없는 사람일 개연성이 크다.연금으로 강남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A는 1990년대 초 강남구 역삼동에 살았다. 다가구주택으로, 12평형에 방 2개인 전셋집이었다. 1990년대 말 직장을 그만두고 받은 퇴직금으로 강남 개포동 주공아파트를 구입했다. 23평형이었는데, 그때 가격이 1억4000만 원이었다. 당시 광진구 자양동, 경기 과천, 분당 등도 돌아봤는데, 그 지역 같은 평형은 1억2000만 원 정도였다. 강남이 15% 더 비쌌지만 그동안 살던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거주하기를 원했기에 개포동 주공아파트를 선택했다. 공무원으로 퇴직한 A는 이후 월 150만 원가량 연금을 받으며 살았다.
그런데 강남 아파트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1억4000만 원에 산 아파트가 10억 원이 됐고, 재건축이 진행되면서 20억 원을 호가했다. 1990년대 말에는 집값이 자양동, 분당, 과천 등과 15% 차이였지만,지금은 2배 이상 벌어졌다. 요즘에는 강남 개포동에 재건축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자로 인식된다. 그런데 A의 수입은 그때나 지금이나 연금뿐이다. 물가상승을 반영해 월 200만 원가량을 받을 뿐이다.
그러면 질문. A는 부자인가. A는 강남 재건축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 시가 20억 원이 훨씬 넘는다. 이러면 누가 봐도 부자라고 얘기한다. 그런데 A가 한 달에 쓸 수 있는 돈은 200만 원이다. ‘월 200’으로 생활비 쓰고, 용돈 쓰고, 또 나중에 병원비 들어갈 걸 고려해 저축도 해야 한다. 먹고살 수는 있지만 빠듯한 돈이다. 마음대로 돈을 써본 적도, 풍족하게 살아본 적도 없다.
혹자는 아파트를 팔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면 되지 않느냐고 말한다. 강남 아파트를 팔고 다른 동네 아파트로 이사하면 10억 원 이상 여유자금이 생긴다. 그 돈으로 잘살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사느냐고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긴 어렵다. 무엇보다 세금 문제가 크다. 1억4000만 원에 매입한 아파트를 20억 원에 팔면 양도소득세가 어마어마하다. 그 세금을 내고 몇억을 챙기기 위해 이사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할 것이냐고 하면 선택의 여지는 크지 않다. 월 200으로 사는 사람에게 몇억 세금을 내는 건 상상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다.
A만 그런 게 아니다. 오래전 강남 지역에 들어와 계속해서 살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마찬가지다. 살고 있는 집값이 올라 겉으로는 부자 같지만 쓸 수 있는 돈은 과거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쓸 수 있는 돈으로만 보면 절대 부자가 아니다. 오히려 중산층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경우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강남을 표적으로 세금을 올리는 부동산 정책에 강력히 반대할 수밖에 없다. 월 200으로 살고 있는데, 집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세금을 올리면 정말 타격이 크다. 사람들은 부자라면 그 정도는 내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떤 기준으로도 월 200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부자라고 할 수 없다. 오랫동안 강남에서 살아온 사람과 최근 강남에 입성한 사람은 절대 같은 강남 주민이 아니다.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강이 보이는 강남 최고급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 공용 사우나에서 샴푸를 챙겨 가는 게 특별한 일일까. 고급 아파트이긴 해도 지금까지 주민들이 살아온 삶은 부자가 아닐 개연성이 크다. 물론 이 아파트가 재건축된다는 걸 알고 투자용으로 산 사람, 신축 아파트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은 부자일 것이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살던 주민은 부자라고 보기 어렵다. 몇십 년 전 아파트를 구입해 계속 살아왔을 뿐이고, 지금 최고가 아파트가 됐을 뿐이다. 어쨌든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으니 가난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부자로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아닌 경우도 많다. 부자의 삶이 아니었으니 사고방식도 부자가 아니다. 그래서 샴푸 값을 아끼겠다고 공용 사우나에서 물품을 훔치는 짓을 한다.
도둑질은 누가 하든 치사한 일
최고급 아파트 주민들이 공용 사우나에서 샴푸를 챙기는 걸 보고 부자는 검소하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있는 걸 아끼는 게 검소함이지, 공용 물품을 챙기는 건 누가 하든 치사한 짓일 뿐이다. 이렇게까지 노력해야 부자가 된다고도 생각지 말자. 어느 누구도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과는 돈 되는 거래를 하거나 큰 계약을 맺지 않는다. 거래 상대방이 없으면 부자도 될 수 없다. 무엇보다 강남에 산다고 다 부자라고 생각하지도 말자. 설령 비싼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해도 재산이 많은 것과 돈이 많은 건 분명 다르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고급 아파트 주민들이 공용 샴푸를 챙겨 가는 행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최성락 박사는…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양미래대에서 경영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21년 투자로 50억 원 자산을 만든 뒤 퇴직해 파이어족으로 지내고 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88호에 실렸습니다]
최성락 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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