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기금형 모델: "네덜란드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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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대출 연장 때문에 은행 지점장님 만나러 갑니다. 간 김에 퇴직연금 얘기도 좀 들어주고 와야죠.” 한국 중소기업 사장님들의 흔한 일상입니다. 앞 장까지 우리는 한 사람의 퇴직연금이 태어나고, 굴러가고, 은퇴 시점에 소득으로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질문의 단위를 바꿔야 합니다. 그 모든 선택과 인출의 뒤에서, 누가 금융기관을 상대하고, 누가 비용을 묻고, 누가 성과를 감시할 것인가. 이론상 퇴직연금 가입자인 기업은 금융기관의 ‘고객’이지만, 현실의 구조 속에서는 자금줄을 쥔 은행의 눈치를 보는 위치에 놓이기 쉽습니다. 그러니 “수수료를 깎아달라”, “수익률 관리를 제대로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 네덜란드에서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대형 자산운용사의 임원이 네덜란드 연금 기금 사무실을 찾아와 말합니다. “저희에게 자금을 맡겨주신다면 수수료를 낮추고, 귀하들이 정한 투자 원칙에 맞춰 운용하겠습니다.” 도대체 네덜란드의 연금은 어떤 힘을 가졌길래 금융기관을 사는 쪽이 아니라 부리는 쪽에 설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은 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피어난 ‘위대한 합의’에 있습니다. [본 이미지는 AI 기술을 활용해 제작되었습니다.]1949년, 폐허 속의 악수 — “뭉쳐야 산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네덜란드는 처참한 폐허 상태였습니다. 나치 독일의 점령과 전쟁으로 산업 기반은 무너졌고 국민들은 가난했습니다. 이때 네덜란드의 노동조합과 사용자 단체는 전쟁 중 비밀리에 결성했던 ‘노동재단’을 통해 결단을 내립니다. “나라를 다시 세우려면 노사가 싸워서는 안 된다. 임금 인상을 자제하고, 그 돈을 모아 미래를 위한 저축을 하자. 단, 개별 기업이 각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 전체가 하나로 뭉쳐서 관리하자.” 이 합의를 바탕으로 1949년, 네덜란드는 산업별 연금기금(BFP, Bedrijfstakpensioenfonds, 1949년 네덜란드 노사 대타협이 만든 거대 기금형 모델)에 대한 의무 가입을 가능하게 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합니다. 한 산업 내의 노사가 연금 기금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그것이 충분히 대표성을 가진다고 인정되면, 그 산업에 속한 기업과 근로자에게 가입을 의무화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이 법 덕분에 네덜란드는 수많은 기업이 뿔뿔이 흩어지는 대신, 공무원·의료·건설 등 거대한 산업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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