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 오래된 명작들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 모습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다. 4K 고화질 리마스터링을 거친 고전의 재개봉은 흥행 부진과 투자 경색, 신작 부재라는 악순환을 겪는 영화시장에 인공호흡기 역할을 하고 있다.
검증된 완성도에 때깔까지 고와진 ‘선명한 클래식’은 “볼만한 영화가 없다”며 등을 돌린 관객을 극장으로 돌아오게 한다. 타르셈 싱 감독의 ‘더 폴: 디렉터스 컷’이 대표적이다. 2006년 국내 개봉한 이 작품은 지난해 크리스마스에 재개봉해 3개월간 누적 관객 18만 명을 돌파하는 흥행 역주행을 보여줬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희생’(1986),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세 가지 색’ 트릴로지(1993~1994), 오시마 나기사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 등도 시네필(영화광)의 눈길을 끈 재개봉 명작이다.
올해도 많은 고전이 재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오는 25일에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2010년 작 ‘그을린 사랑’이 돌아온다. ‘듄’ 시리즈와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등을 연출해 할리우드 거장 반열에 오른 빌뇌브 감독의 재능을 영화계에 알린 작품이다.
‘그을린 사랑’은 레바논 태생의 캐나다 극작가 와즈디 무아와드가 쓴 희곡을 바탕으로 빌뇌브가 시나리오부터 연출까지 맡았다. 어머니가 남긴 유언장 속 단서를 들고 숨겨진 비밀을 찾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고향인 중동으로 떠나는 두 남매 이야기를 담았다. 몰입도 높은 전개와 충격적인 반전,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역사적 비극 속에서도 가족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메시지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는 플래시백 등 빌뇌브식 연출의 시발점이 된 작품이다. 2011년 국내 개봉했을 당시에도 14개 관에서 7만 명 넘는 관객을 동원해 화제를 모았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격하게 대립하던 1970~1980년대 중동 지역이 배경이지만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참상이 여전하다는 점에서 볼 가치는 충분하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델마와 루이스’(1991)도 다음달 재개봉해 34년 만에 국내 관객과 만난다. 평범한 주부 델마(지나 데이비스 분)와 식당 웨이트리스 루이스(수전 서랜던 분)가 미국 남서부를 필사적으로 질주하는 여정을 그린 영화다. 전정현 CGV 콘텐츠운영팀장은 “로드무비 형식을 빌려 여성 서사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한 상징적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 40주년을 기념해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도 오는 25일 극장에 다시 걸린다. 대중적 선호를 따지는 대신 미야자키 감독이 자신의 취향과 철학을 담은 작품으로 ‘모노노케 히메’ 등 지브리 세계관에 큰 영향을 줬다.
하반기에도 리마스터링 재개봉 영화가 극장에 걸리는 모습은 지속될 전망이다.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비축된 ‘창고영화’가 지난해와 올해 대부분 개봉했고, 자금난으로 신작 투자도 여의찮기 때문이다. 재개봉 영화는 이미 판권을 보유해 비용 부담이 적고 두꺼운 팬층을 확보해 마케팅 비용을 아낄 수 있다. 한 배급사 관계자는 “과거 극장에서 본 명작의 향수에 이끌린 중장년층부터 TV로만 보던 작품을 극장에서 보고 싶어 하는 젊은 세대까지 두루 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