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회적 가치 페스타' 열려…탄소중립 해법 등 모색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제안한 'EPC' 개념의 발전적 제안 '눈길'
“2015년 파리기후협약에 따라 2050년까지 약 60Gt에 이르는 탄소를 줄이거나 흡수하려면 기후테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기후테크 활성화를 위해 ‘미리 인센티브’ 개념인 EPC(환경보호크레딧, Environmental Protection Credit)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허승준 사회적가치연구원 EPC 팀장의 말이다. 허 팀장은 “현재 1.2조 달러(민간자본 비중 53%)규모의 기후금융을 9조 달러(민간자본 비중 70%)까지 높여야 하는 것이 숙제”라며 “투자자가 기후테크를 운영하는 솔루션 오너에게 미리 자금을 지원해줄 수 있는 수단이 활성화된다면 오너와 투자자 모두 수익성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업의 사회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대한민국 사회적 가치 페스타’의 컨퍼런스 세션으로서 지난 25일 오후 5시 코엑스 C홀에서 ‘탄소중립을 위한 새로운 해법, EPC’ 세션이 개최됐다. 세션에는 EPC 개념의 이해와 확산을 위해 정부, 글로벌 민간투자, 기후테크기업, 시민단체, 학계, 컨설팅사 등 약 150여명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했다.
이 자리는 2024년 11월 도쿄포럼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제안한 EPC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EPC는 기후기술의 미래 탄소감축 성과를 예측하여 현재 시점에서 인센티브를 주는 시장 시스템이다. 인센티브의 방식은 탄소크레딧 선구매, 선투자, 금리할인, 세액공제권 거래 등 다양하게 설계될 수 있으며 탄소감축 시계를 당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 EPC가 실현되면 △기후기술 기업은 조기 자금조달이 가능하고 △투자자는 탄소감축 성과에 기반한 수익을 확보하며 △정부는 민관협력을 통한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달성에 가까워질 수 있다.
이날 각 영역을 대표하여 진승우 기획재정부 미래전략국 팀장, 김효은 글로벌 인더스트리 허브 대표, 박형건 캡처식스 부대표, 윤세종 플랜 1.5 변호사, 이종섭 서울대 교수, 이선경 켐토피아 상무, 허승준 사회적가치연구원 EPC 팀장이 패널로 발언했다.
이선경 켐토피아 상무는 기업과 소비자 모두에게 여전히 탄소 배출이 감축보다 경제적으로 유리한 현실을 지적했다. 따라서 탄소감축을 하지 않는 집단에는 비용(벌칙)을 부과하고, 모범적으로 감축하는 집단에는 프리미엄(보상)을 주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상무는 “한국의 기후금융은 장기적 미래 가치 평가 능력이 부족해, 기후·탄소감축·환경 분야의 투자 활성화가 더딘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클라임웍스와 글로벌 인더스트리 허브의 김효은 대표는 해외에서처럼 민간자본이 대규모 기후 인프라와 기술 전환에 참여할 수 있는 수익성 있는 구조 설계와 리스크 분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글로벌 필란트로피(자선활동가)가 인내 자본을 바탕으로 신기술을 지원하고 있다”며 “기후금융에 공공·민간·자선사업자가 함께하는 블렌디드 파이낸싱 모델이 확산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에 더해 기후기술 기업이 처해있는 현실도 논의되었다. 박형건 캡처식스 부대표는 “전 세계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자발적 탄소시장을 통해 CDR 크레디트(탄소 제거권)을 구매하고 있지만 한국의 배출권거래제는 감축 중심으로 설계됐고 배출권 가격도 국제 수준보다 낮아 공학 기반 CDR 크레디트 거래가 제도적 보상에서 소외되고 있어, 보완하는 대안으로서 EPC에 대한 기대가 높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EPC는 어떻게 구현해 볼 수 있을까? 사회적가치연구원 허승준 팀장은 EPC가 탄소크레디트 형태로 실행될 경우 두 단계로 작동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먼저 사업 이전 단계에서는 미래 감축 성과를 기반으로 한 EPC를 미리 발행해 기업이 조기 자금을 확보하고 투자자는 지분을 가진다. 이후 사업 이후 단계에서는 실제 감축 성과가 입증되면 EPC가 정식 탄소크레디트로 전환되어 시장에서 거래되고, 투자자와 기업 모두 성과에 따른 보상을 얻게 된다. 안정적 운영을 위해서는 정부나 국제기구 같은 신뢰성 있는 협의체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어 해외 유사 사례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추진하는 CORSIA와 싱가포르 통화청(MAS)·록펠러 재단이 주도하는 TRACTION을 소개했다. CORSIA는 2021년부터 시행되어 국제항공 부문의 탄소중립 성장을 목표로 2019년 배출량의 85%를 기준으로 삼고, 직접 감축·SAF 사용·외부 크레딧 활용을 결합한 감축 방식을 운영한다. TRACTION은 아시아 석탄발전소의 조기 폐쇄를 통해 방지된 배출량을 전환 크레딧으로 발급·거래하여 싱가포르 탄소세 적용을 받지 않고 발전소 소유자와 크레딧 구매자 모두가 탄소중립 달성에 기여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러한 아이디어에 대해 정부에서도 동의하는 분위기다. 진승우 기획재정부 미래전략국 탄소중립담당 팀장은 “2030 국가온실가스 감축 목표(NDC) 달성은 앞으로 2억톤을 추가로 감축해야 하는 매우 도전적인 목표”라며 “탄소중립을 위해 정부·민간·사회가 함께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정부는 한국형 탄소크레디트 활성화를 추진하면서 자발적 탄소시장 인프라 구축과 다양한 수요처 발굴을 통해 새로운 시장 개척에 적극 나설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어서 이종섭 서울대 교수는 환경·사회와 관련한 전환의 핵심성과지표(KPI)를 금융의 혜택으로 금전적 보상을 하는 개념은 많은 장점이 있다며, 에너지 분야 등 환경뿐 아니라 공장자동화 및 소셜과 관련한 부분도 확장성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블록체인 기반 기술을 활용한 실시간 데이터 측정, 검증이 중요하고 이 데이터를 교류할 수 있는 데이터 마켓이 데이터 자체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기반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EPC 제도의 도전과제도 있다. EPC의 도전과제로는 감축 취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신뢰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 제기되었다. 시민단체를 대표해 플랜 1.5의 윤세종 변호사는 인센티브와 감축실적 거래가 결국은 감축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제안하며 EPC의 역할과 의미를 확립해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한상의 김남희 팀장은 인증기관이 신뢰성 문제를 해결하고 정부가 민간의 움직임을 준제도권으로 편입하거나 ESG 공시와 연계해야 크레딧 수요가 확산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플로어에서 오대균 서울대 교수는 “규제시장에서 EPC를 어떻게 다룰지 정의되어야 하고, EPC를 살 이유를 사회적으로 만들어주어야 한다”며 “카본 크레디트가 주로 이야기가 되지만 플라스틱 크레디트, 생물다양성 크레디트도 나오는 상황에서 사회적가치를 더하는 다양한 방식을 고려할 필요가 있고, 근본적으로 감축 의무의 상쇄 수단으로서 끝단의 수요가 해결되어야만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마무리로 이번 세션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끈 사회적가치연구원의 정명은 실장은 “EPC 과제를 극복하기 위해 협의체나 민관협력이 필요하다”며 “EPC는 기후기술의 미래 탄소감축 성과에 대한 사전 보상을 제안하는 제도로서 이를 클린에너지·전환금융 영역에서 시도해 보고, 민간의 움직임이 성과를 내면 정부가 준제도권 편입을 통해 제도화를 추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현화 기자 ku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