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의 도발]정치에 ‘공짜 스폰’은 없다

20 hours ago 4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는 여유만만이다. 지난달 30일 낮엔 국회에서 총리 지명 철회를 요구하며 철야농성 중인 나경원 국힘의힘 의원을 찾아 “단식하지 말라”며 “자, 수고”하고는 떠났다.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30일 국회에서 열린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 ‘국민청문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앞에는 김 후보자의 자금 출처 의혹을 비판하기 위한 배추들이 쌓여있다. 뉴스1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30일 국회에서 열린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 ‘국민청문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앞에는 김 후보자의 자금 출처 의혹을 비판하기 위한 배추들이 쌓여있다. 뉴스1

같은 날 국힘은 국회에서 김민석 대신 배추 18포기를 모셔놓고 국민청문회를 열었다. 김민석이 미국 유학 시절 강모 씨로부터 배추농사 투자 수익 배당으로 월 450만원 씩 지원받았다고 한 것을 실감나게 표현한 모양이다.

배추농사를 짓는 농민 김대희 씨는 이 자리에 나와 “배추로 다달이 (돈을) 받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배추가 국회에 나와 있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배추한테 참 미안하다”는 말엔 웃지도 울지도 못하겠다.

● 김민석이 끌어낸 86 정치인 금전 문제

국힘은 1일도 총리 지명 반대를 계속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더불어민주당은 조만간 총리 후보자 인준안을 단독 처리할 태세다. 그럼에도 민심의 미묘한 변화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지난 주말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김민석의 총리 임명에 43%가 ‘적합하다’고 답했다(부적합은 31%). 하지만 인사 청문회 2주 전 여론(적합 49%·부적합 23%)과 비교하면 부정적 반응이 늘어난 것이 심상치 않다.

지난달 30일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맨 왼쪽)가 국회 로텐더홀에서 농성 중인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오른쪽 두번째)를 찾았다. 왼쪽부터 김 후보자, 국민의힘 박충권 김미애 의원, 나 의원, 김민전 의원. (독자 제공)

지난달 30일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맨 왼쪽)가 국회 로텐더홀에서 농성 중인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오른쪽 두번째)를 찾았다. 왼쪽부터 김 후보자, 국민의힘 박충권 김미애 의원, 나 의원, 김민전 의원. (독자 제공)

청문회는 무자료·무증인·무참고인의 3무(無) 청문회였다. 김민석은 성실한 해명은커녕 (상대적으로) 젊은 총리 후보자답지 않게 오만했다.무엇보다 이번 김민석 청문회는 ‘정치인의 스폰서’ 문제를 끄집어냈다는 데서 의미심장하다. 특히 1980년대 학생운동을 훈장삼아 정계 진출한 86그룹 정치인들이 돈 한번 벌어본 적 없으면서 수단도 좋게 먹고살고, 자녀 유학까지 보내는 귀족적 삶은 청산돼야 할 적폐가 아닐 수 없다.● 86그룹은 뭔 돈으로 자녀 유학 보냈나

사복경찰들이 대학 캠퍼스에 상주하는 전두환 독재정권 시절이었다. 시위가 벌어지면 중무장한 전경들이 학생들 팔다리를 번쩍 들어 닭장차에 실어갔다. 운동권 아닌 ‘비(非)민주 학생들’은 집회가 열리는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을 지나갈 때면 죄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도 비(非)운동권 86세대가 심리적 부채감에 86 정치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온 이유다.

82학번 김민석은 운동권 스타였다. 활동비가 없어 쪼들렸지만 85년 미문화원 점거사건 주도 혐의로 경찰 수배를 받을 때는 “내 사정을 걱정한 사회학과 친구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줘 형편이 오히려 나아졌다”고 했다(1995년 저서 ‘뛰면서도 사랑할 시간은 많습니다’).

1985년 5월 23일 벌어진 서울 미국문화원 기습 점거 사건과 관련해 기소된 김민석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삼엄한 감시 속에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동아일보DB

1985년 5월 23일 벌어진 서울 미국문화원 기습 점거 사건과 관련해 기소된 김민석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삼엄한 감시 속에 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동아일보DB

그렇게 배운 버릇이 아니었으면 한다. 역시 운동권 출신으로 90년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을 지낸 ‘시민단체 길’ 대표 민경우는 2020년 한 인터뷰에서 “현 정권의 586 정치 실세들은 돈 버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돈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을 경험 못 한 집단”이라고 했다. 그래서 최저임금이 오르면 고용이 줄어든다는 당연한 사실도 이해 못했다는 얘기다. 주사파였던 그가 정신 차리게 된 것도 직접 (수학) 학원을 꾸려 돈을 벌어보면서였다고 했다.

문재인 정권 시절, 이인영 당시 통일부 장관의 인사 청문회 때도 아들의 스위스 유학을 놓고 논란이 일었다. 임종석 당시 대통령비서실장 딸의 미국 유학과 명품 치장을 놓고도 의혹이 분분했다. 무슨 돈으로 그 비싼 뒷바라지를 했느냐는 거다. 그래도 김민석처럼 스폰서 의혹이 불거지진 않아 대충 넘어갔다.

● “스폰 중독은 약이 없다” 국힘의 일갈

김민석은 2002년 서울시장 선거,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물론 두번 다 김민석은 “정치검찰의 표정사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가족처럼 지내는’ 강 씨가 2018년에도 또 거액을 빌려준 사실이 이번 청문회 과정에서 드러났다. 그는 김민석과 2014년 민주당을 창당해 2016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1번-2번으로 나섰다 낙선한 전력이 있다(2016년 민주당은 더불어민주당과 통합). 김민석이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은 이번 대선에선 체육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을 만큼 관계를 이어왔다.

지난달 25일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둘째날 출석해 발언 전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뉴스1

지난달 25일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가 인사청문회 둘째날 출석해 발언 전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뉴스1

강 씨를 비롯해 자신에게 선의를 베푼 이들에 대해 김민석은 ‘하나같이 내게 뭘 바라거나 부탁할 일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다(2012년 저서 ‘3승’). 과연 그럴까. 김민석은 2010년 5월 정읍시장 선거를 위해 민주당 최고위원으로서 연두색과 초록색이 섞인 선거운동복을 입고 지원유세를 뛰었다. 강 씨는 정읍에 사업체를 두고 있는데, 새 정읍시장이 당선된 뒤 강 씨가 사업을 더 확장할 수 있었다는 게 최근 TV조선의 단독 보도다.

정치인과 스폰서의 전형적 행태라고 그 언저리 사람들은 말한다. 차용증은 만들되 문제가 터질 때까지 갚으라고도, 갚을 생각도 않는 것. 청문회 공격수 주진우 국힘 의원이 “스폰 중독은 약이 없다”고 일갈한 것도 이 때문일 터다.

● 인사·사면 요청했던 노무현의 비선실세

25일 청문회에서 곽규택 국힘 의원은 무력한 야당의힘을 절감한 듯 이렇게 말했다. “국무총리 지명돼 가시면요. 과거의 인간관계, 마음 아프지만 끊으셔야 됩니다. 스폰서 후원자라고 하시는 분들요, 20년 동안 아무런 대가 바라지 않는다고 지원해 주는 척 하다가 마지막에 한번 혜택 보는 거예요.…(중략) 국무총리를 겸한 당내 최고 실세, 이런 분한테 이런 후원자들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 나흘 째인 2009년 5월 26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분향소에서 ‘노무현의 후원자’로 불린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이 조문하고 있다. 동아일보DB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 나흘 째인 2009년 5월 26일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분향소에서 ‘노무현의 후원자’로 불린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이 조문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이런 관계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후원자로 13년 전 세상을 떠난 강금원을 떠올리게 한다. 생전의 노무현은 2009년 4월 당시 창신섬유 강 회장이 주식회사 봉화 설립자금으로 70억원을 쓰는 등 회삿돈 횡령과 탈세로 구속되자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을 맞은 것”이라고 원통해 했다. 노 대통령 자신의 임기 동안 강 회장은 어떤 청탁도, 사업 확장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사저널이 2012년 8월 강금원 별세 후에 공개한 인터뷰를 보면, 딴판이다. 2011년 5월 기자와 만났던 강금원은 “노 대통령은 내가 건의했던 장·차관 인사를 거의 다 들어주셨다”고 했다. “특히 내가 추천했던 호남 출신 법조계 사람도 많이 임명됐다”며 이름까지 밝혔다(여기선 대법원장·검찰총장·헌법재판소장이라고만 해둔다). 2007년과 2008년 박지원, 권노갑, 한화갑, 김우중 사면을 건의한 사람도 강금원 자신이었는데 결국 사면됐다고 했다. 비선실세였던 셈이다.

● 누가 함부로 정치 후원자를 건드리겠나

“인사 청탁하다 걸리면 패가망신 시키겠다”던 노무현이 강금원 청탁을 숱하게 들어줬다는 건 나도 이 글을 쓰면서 알았다. 같은 내용이 노무현을 수사했던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의 2023년 저서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에도 실려 있다.

2009년 6월 12일 이인규 당시 대검 중수부장(가운데)이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박연차 게이트’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그는 2023년 회고록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를 썼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2009년 6월 12일 이인규 당시 대검 중수부장(가운데)이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서 ‘박연차 게이트’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그는 2023년 회고록 ‘나는 대한민국 검사였다’를 썼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이인규는 “그 청탁 과정에서 금품 수수 등 어떠한 부정행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측근의 부탁을 받고 국가 중요 인사를 한 것은 국정 농단에 해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주식회사 봉화가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의 미르재단·K스포츠재단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도 했다.

대가를 노리고 정치인에 접근했다는 ‘스폰’은 없다. 다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아름다운 후원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나 “대통령의 후원자가 경영하는 회사를 어느 국가기관이 함부로 건드리겠는가? 말 안 해도 음으로 양으로 혜택을 받기 마련”이라고 대한민국 검사였던 이인규는 폭로했다.

● 스폰서를 끊든지, 죽어도 들키지 말든지

김민석은 불법 정치자금으로 인한 정치규제 18년에 대해 “미국(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석사·럿거스대 로스쿨)도 가고 중국(칭화대 법학원)도 갔다”며 “조금 더 자유로운 입장에서 판을 크고 깊게 보는 데 도움을 받은 것 같다”고 올초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캐묻지 않아서였는지 반성도 없었다.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더 많게 살면서도 총리 지명까지 받은 86정치인의 성공에 경하한다.

미국서 모의협상 수업을 받으며 그가 얻은 교훈은 “내부에서 최대한 주류가 되든지, 내 의견을 어떻게든 주류로 만들든지”였다고 한다(95년 저서). 비주류 역할을 맡으면 끼어들 틈이 없다는 한계를 경험하며 알게 됐다지만 18년 간 정치낭인 생활에서 더 뼈저리게 느꼈을 것같다. 김대중·정몽준·추미애에 이어 이재명까지, 당 대표의 최측근으로 발돋움해 마침내 총리에 지명된 것도 그때의 깨달음 덕분이 아닌가 싶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국회 시정연설을 위해 본회의장에 입장하며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와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국회 시정연설을 위해 본회의장에 입장하며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와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 대통령으로선 김민석 같은 ‘흠 있는 총리’가 부리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그를 총리로 임명하는 순간, 이 대통령의 신뢰 리스크도 김민석과 더불어 커진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한다(“윤석열 정부의 내란보다 더 하겠나”같은 비난은 참아주시길). 노무현-강금원 관계를 통해 드러났듯, 정치에 ‘공짜 스폰’은 없다. 스폰서를 끊을 수 없다면 제발 세상 떠날 때까지 들키지나 말기 바란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