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탈리아 거치던 시대는 끝났다…국내서 길러낸 '세계 성악 주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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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회 벨베데레 콩쿠르 우승자 박성민과 제 21회 서울국제콩쿠르 우승자 정강한 / 사진. 이솔 기자.

제 44회 벨베데레 콩쿠르 우승자 박성민과 제 21회 서울국제콩쿠르 우승자 정강한 / 사진. 이솔 기자.

지난 19일 서울대 음대에서 만난 베이스 박성민(26)과 테너 정강한(22)은 최근 국제 콩쿠르를 휩쓴 주역들이다. 각각 벨베데레 콩쿠르 우승과 서울 국제 콩쿠르 최연소 우승 타이틀을 거머쥔 이들은 한국 성악이 세계의 주류가 되었음을 몸소 증명했다. 아직 캠퍼스를 누비는 학생 신분이지만 이들이 꺼내놓은 경험담은 묵직했다.

○'유학 필수' 공식의 균열…세계적 스승이 일군 국내파 선순환

그동안 클래식계에서 국제 무대 진출 공식은 단순했다. 국내 음대에서 기초를 닦은 뒤 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이나 미국으로 건너가 언어와 현지 스타일을 익히고 오페라 극장과 콩쿠르를 거쳐 세계 무대에 진입하는 경로였다. 한국 성악계를 대표하는 스타들 역시 이 길을 충실히 밟았다.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 서선영과 박종민, 2014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 황수미 등도 국내에서 성장한 뒤 유럽 유학을 거쳐 세계 정상에 올랐다.

하지만 박성민과 정강한의 도약은 견고한 공식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베이스 박성민은 "어디에서 공부했느냐보다 연습실에서 얼마나 집중력있고 진지하게 준비했는 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세계 무대에 서려면 반드시 일찍이 유학을 떠나야한다는 것이 오늘날 절대적인 명제는 아니란 의미다. 테너 정강한도 "한국의 클래식 교육 레벨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짚었다. 그 역시 해외 유학이나 연수 경험이 전무한 인물이다. 국내 대학에서 연마한 발성 테크닉과 내공만으로 본선 무대를 정면 돌파했다. 그는 "세계 최고 오페라 극장에서 활동했던 스승의 노하우를 국내에서 그대로 전수받았기에 두려움 없이 국제 무대에 도전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카스카이스 국제 성악 콩쿠르 파이널 무대에서 노래하는 소프라노 박누리 / 사진. 박누리 제공.

카스카이스 국제 성악 콩쿠르 파이널 무대에서 노래하는 소프라노 박누리 / 사진. 박누리 제공.

올해 한국 성악가들이 거둔 글로벌 성과의 중심에는 서울대 음대 성악과 전승현 교수가 있다. 전 교수는 1997년 벨베데레 국제 성악 콩쿠르 준우승을 시작으로 독일 슈투트가르트 국립오페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밀라노 라 스칼라, 빈 슈타츠오퍼 등 유럽 초일류 무대를 누빈 세계적인 베이스다. 2011년에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주정부로부터 최고 성악가에게 주어지는 '궁정가수(Kammersänger)' 칭호를 받기도 했다. 29년 전 벨베데레 무대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던 전 교수는 이를 발판 삼아 유럽 주류 무대로 직행했다.

거장의 DNA를 이어받은 국내파 제자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이번 박성민의 벨베데레 콩쿠르 우승은 스승이 걸었던 그 길을 제자가 찾아가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는 점에서 더욱 극적이다. 전 교수의 글로벌 제자는 이들뿐만이 아니다. 지난 7일(현지시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카스카이스 오페라 국제 성악 콩쿠르 여자 부문에서 우승을 거머쥔 소프라노 박누리(28) 역시 전 교수의 문하다. 현지 무대를 경험한 스승의 노하우가 국내 교육 프로세스에 고스란히 이식되면서 이제 한국의 강의실과 연습실은 그 자체로 세계 무대로 향하는 가장 확실한 '직항로'가 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경제와 인터뷰 중인 제 44회 벨베데레 콩쿠르 우승자 박성민 / 사진. 이솔 기자.

한국경제와 인터뷰 중인 제 44회 벨베데레 콩쿠르 우승자 박성민 / 사진. 이솔 기자.

○반주 먼저 보는 박성민, 텍스트 파고드는 정강한

박성민과 정강한 모두 '세계적 오페라 가수'라는 같은 목표를 가졌지만 음악을 만드는 방식은 서로 달랐다. 박성민은 새로운 작품을 공부할 때 성악 선율보다 반주를 먼저 들여다본다. 피아노나 오케스트라 파트 안에 작품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숨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반주를 반복해 들으며 작품의 분위기와 구조, 오페라 전체의 내용과 등장인물의 관계를 먼저 파악한 다음, 가사와 발음, 음정과 리듬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가 벨베데레 콩쿠르를 준비하며 가장 많이 고민한 것도 '자신만의 해석'이었다. 박성민은 "정답을 찾기보다 '박성민이라면 이 인물을 어떻게 표현할까'를 끊임없이 생각했다"고 말했다. 기교 있는 목소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무대 위에서는 그 사람만이 가진 진정성과 개성이 전달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국경제와 인터뷰 중인 테너 정강한 / 사진. 이솔 기자.

한국경제와 인터뷰 중인 테너 정강한 / 사진. 이솔 기자.

정강한의 출발점은 텍스트다. 그는 악보를 펼치면 먼저 가사를 읽는다. 문장 전체의 흐름, 개별 단어의 뜻, 정확한 발음 기호를 정리한 뒤에야 피아노 앞에 앉아 음정을 짚는다. 서울 국제 음악콩쿠르를 준비하면서도 그는 기교를 앞세우기보다 음정, 박자, 음악성이라는 기본기에 집중했다고 했다. 무대에 설 때는 욕심과 부담을 내려놓고 '비워낸 마음'으로 노래하려 했다. 독보적인 고음과 성량 등으로 경쟁했던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갖추기 위한 훈련을 했다.

박성민이 도전하고 싶은 역은 베르디 오페라 '아틸라'의 주인공 아틸라다. 그는 "베이스는 나이가 들면서 목소리와 음악이 함께 성숙해지는 경우가 많다" 며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한 단계씩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강한은 푸치니의 대표작 '투란도트' 속 칼라프 왕자를 꿈꾼다. 물론 더 많은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도 안다. 정강한은 "10년 뒤 세계 주요 오페라극장을 누비며 관객에게 울림을 주는 성악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제 44회 벨베데레 콩쿠르 우승자 박성민과 제 21회 서울국제콩쿠르 우승자 정강한 / 사진. 이솔 기자.

제 44회 벨베데레 콩쿠르 우승자 박성민과 제 21회 서울국제콩쿠르 우승자 정강한 / 사진. 이솔 기자.

이들에게 성악은 큰 소리를 내는 노래 자랑이 아닌, 음악을 통해 감동을 전하는 예술이다.이들은 "다양한 언어와 레퍼토리를 소화하는 콩쿠르에서는 더더욱 기교보다 발성의 기본을 붙들어야 자기만의 해석에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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