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유산 지킴이들] 〈5〉 발굴작업 반장 윤희구-고현철씨
호미-꽃삽 들고 19년째 땅밑 훑어
“조상이 쓰던 물건들 찾아내는 보람”
쪽샘유적-동궁-월지 등 매일 파내
‘천년고도’ 신라의 도읍 서라벌이 있던 땅, 경북 경주. 이곳엔 묻힌 유물과 유적을 호미와 꽃삽으로 캐내 세상의 빛을 보게 하는 이들이 있다. 경주 ‘쪽샘유적’의 작업반장 윤희구 씨(73)와 ‘동궁과 월지’ 작업반장 고현철 씨(70)도 그렇다. 2007년부터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소속으로 19년째 발굴 작업을 이어 왔다. 유물이 학예연구사 등의 손에 다다르려면 반드시 발굴 현장 종사자들의 삽질에 ‘걸려야’ 한다.
4일 두 사람을 만난 쪽샘유적은 4∼6세기 신라 왕족과 귀족이 잠든 집단 묘역이다. 총면적은 38만4000m²(약 11만6000평)로 축구장 면적의 약 53배. 지금까지 전투용 말이 착용한 갑옷 등이 출토됐다.
현장 종사자 17명을 통솔하는 윤 반장은 “천마총, 대릉원에 비하면 화려하진 않을 수 있다”면서도 “우리 조상이 실제로 쓴 물건이기에 더 특별하기도 하다. 2022년 발견했지만 본격 발굴 전이라 아직 매립 상태인 이형 탁잔(잔과 잔받침 한 벌로 된 그릇)이 대표적”이라고 했다.고 반장이 종사자 20명과 발굴하는 동궁과 월지는 신라시대 태자의 생활공간. 올 2월 경주문화유산연구소가 기존 월지(안압지)의 서쪽에 있다고 알려졌던 동궁(東宮)의 ‘진짜 위치’를 발표해 또 한번 주목받았다. 고 반장은 “일반 건물지엔 없는 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심상치 않다 싶더니 동궁에 딸린 연못 터였다”고 회상했다.
이렇듯 ‘돌의 가치’를 파악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발굴터 ‘신입’은 자재를 나르는 것부터 시작해 호미질 등을 차례로 배우며 기초를 다진다. 고 반장은 “예컨대 무덤 둘레에 쌓은 호석(護石)이나 줄지어 놓인 석렬(石列)의 일부면 돌멩님이고, 따로 있거나 점토 아닌 모래만 묻었으면 그냥 돌”이라며 “수년간 경험해야 체득할 수 있다”고 했다.
작업반장은 전체 상황을 ‘매의 눈’으로 주시하기도 해야 한다. 현장에서 돌과 흙을 올바로 다루는지 살핀다. 윤 반장은 약 6년 전 한 종사자가 유물을 빼돌리려 했던 일화를 떠올렸다. “울타리 옆에 몰래 묻어뒀다가 퇴근하며 가져가는 게 폐쇄회로(CC)TV에 찍혔어요. ‘내일 돌려주면 신고 안 하겠다’ 했더니 슬쩍 갖다 놨더군요. 귀한 유물은 아닐지 몰라도, 이 땅에서 나온 건 전부 신라 것 아닙니까.”고 반장은 “작은 것도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며 ‘선각단화쌍조문금박’을 언급했다. 종이처럼 얇은 두께(0.04mm)의 금박에 꽃과 새가 세밀히 새겨진 8세기 유물이다.
“돌돌 말린 채 볼품없이 발견됐습니다. 원래 연밭 자리였으니 관광객이 흘렸나 했죠. 그런데 20m 옆에서 비슷한 물건이 또 나왔어요. 연구관이 조심스레 펴보더니 ‘대단한 물건이니 보안 유지해 달라’고 하더군요. 기분이 어찌나 묘하던지….”
두 반장은 이날도 발굴 도중에 인터뷰에 응했다. 가만히 서있어도 얼굴이 달아오르는 뙤약볕 날씨였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허허벌판. 파라솔 아래서 잠깐씩 더위 쫓으며 일하는 이들의 일당은 9만2000원.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인 걸 감안하면 최저시급이나 다름없다.
품삯이 쏠쏠한 건설 현장도 많은데, 이들이 오랜 세월 발굴터를 지킨 이유는 뭘까. 두 사람은 “돈 따지면 못 한다”고 입을 모았다.
“옛 어른들이 쓰던 물건을 내 손으로 캐내 후세에 남기는 일이잖아요. 그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일합니다. 윤 반장도 나도 경주 토박이 아닙니까. 신라 왕경이 어찌 생겼는지, 그 실체를 밝혀내는 게 염원이지요.”(고 반장)경주=이지윤 기자 leemai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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