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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수의 ‘선소운’(1955). 검은색 한복을 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빗은 여인이 뭔가 생각에 빠진 듯하다. ‘선인의 피리소리’라는 뜻의 작품명대로라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가락에 귀를 기울이는 중일 거다. 단아한 여인상은 화백이 추구한 ‘동양미의 세계’에 자주 중심에 섰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반전이 있다. 굳이 날카로운 흰선을 그어 옷주름을 만들고 정적인 분위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은 거다. ‘제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1955)에서 동양화 부문 최초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스물여덟 살의 박노수가 화단에서 큰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됐다. 그림 위쪽에 ‘을미년 9월 월아장에서 그리다 박노수’라고 화제를 올렸다. 지난 6월 26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막한 ‘MMCA 과천 상설전: 한국근현대미술Ⅱ’에 걸렸다. 종이에 색, 187×158㎝.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정하윤 미술평론가] ‘좋은 그림’이란 무엇일까. 사진처럼 정밀하게 그린 그림일까, 세련된 색채를 지닌 그림일까. 혹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묘한 울림을 주는 그림일까. 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국화가 박노수(1927∼2013)라면 분명히 “여운이 있는 그림”이라 했을 것이다. 배우 이민정의 외할아버지로도 알려진 그는, 평생 그림 속 ‘여운’을 탐구한 화가였다.
‘여운’이라니 무슨 뜻일까.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박노수 자신도 처음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스승인 청전 이상범(1897∼1972)으로부터 처음 이 단어를 들었을 때, 그는 한국화에 대해서조차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서 천자문을, 아버지에게서 서예를 배우긴 했지만 한국화나 화론은 접해본 적이 없었다.
사실 박노수가 처음부터 한국화가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마음을 뒀던 것은 서양화였다. 충북 청주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운 교사를 보며 자신도 같은 길을 가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학은 쉽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스스로 서양화를 익히던 중 우연히 책에서 이상범의 산수화를 접하고는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곧장 서울로 이상범을 찾아갔다. 1944년 열일곱 살 때였다. 이때부터 그는 서울 종로구 누하동에 있던 이상범의 화숙에서 본격적으로 수묵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17세에 스스로 이상범 화숙 찾아 수묵화 배워
이상범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던 1년 반 동안 박노수가 가장 자주 들은 말은 “그림에는 여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노수는 스승의 가르침에 큰 충격을 받았다. 여운이라니. 그게 무엇일까. 알고 싶었다. 관련 서적을 구해 ‘여운’이나 ‘기운생동’ 같은 개념을 다룬 동양화론을 탐독했다. 그래도 쉽지 않았다. 아무리 공부하고 고민해도 파악하기 어려웠고,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일은 더욱 난해했다. 그러나 바로 그 어려움이 박노수에게 그림을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이때부터 그에게 그림은 곧 여운이었다.
비록 박노수 자신은 그림에 어려움을 느꼈지만 주변에서는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던 듯하다. 1946년 박노수는 서울대 예술대학 미술부 제1회화과(동양화과)에 입학했다. 광복 직후 한국화단의 목표는 분명했다. 일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여전히 강했으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이를 실천하는 한 방법은 색채를 완화하는 것이었다. 일본화가 강렬한 원색으로 화면을 채웠다면 한국작가들은 안료에 물을 충분히 섞어 색을 옅게 쓰거나, 아예 색을 빼버리고 먹만으로 작업하기도 했다. 이 방법이 왜색을 지우는 그 시대 작가들의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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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수의 ‘소년’(1968). 비쩍 마른 나무에 기대어 서서 피리를 불고 있는 소년의 모습을 담아냈다. 눈을 지그시 감고 긴 손가락을 움직이는 섬세한 묘사가 현실감을 높이지만 소년을 둘러싼 공간은 초현실적이다. 붉은색으로 배경을 채우고 짙은 녹색의 풀들을 배치해 강렬한 색채 대비를 의도했다. 종이에 색, 144.5×108㎝.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컬렉션) 소장. |
한국화단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는 국제 미술계의 흐름을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일이었다. 큐비즘, 앵포르멜, 추상표현주의 등 ‘모더니즘’을 받아들이면서도 한국적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 언뜻 모순처럼 보였지만 당시 화가들에게는 절박한 문제였다. 더 이상 세계의 흐름에 뒤처질 수 없었고 그렇다고 전통을 버릴 수도 없었다. 두 길 모두 이미 나라를 잃는 아픈 경험으로 이어졌던 만큼 그 균형은 반드시 필요했다.
일본화의 장식적 채색을 벗고 전통 문인화의 정신을 되살리되 현대적 감각을 담아 새로운 한국화를 세워라! 이는 그 시대 모든 화가에게 던져진 요청이었고 각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응답해야 했다.
박노수의 답은 1955년 작 ‘선소운’에 담겨 있다. ‘선인의 피리소리’라는 뜻으로 제목을 붙였지만 작품 속에서 선인이나 피리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한복을 입고 앉은 여인의 옆모습이 길이 187㎝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색채는 거의 빠져 있다. 슬리퍼와 의자에 간간이 색을 사용했지만 일본화처럼 눈을 사로잡는 원색은 아니다. 오히려 여인의 검정 한복이 더 강렬하다. 표현은 대담하다. 칼로 자른 듯 날카로운 선들이 한복의 주름을 나타낸다. 뾰족한 선들을 사용해 형태를 면으로 나누는 방식은 피카소의 입체파 시절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손과 얼굴의 필치는 매우 세밀하다. 반복적인 스케치를 통해 다진 박노수의 정확한 소묘 실력 덕분이다.
대학 시절 박노수는 특히 여인의 인물화를 즐겨 그렸다. 이는 산수화를 주로 그리던 첫 스승 이상범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그 선택의 배경에는 스승의 또 다른 가르침, 곧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라’는 말이 있었다. 박노수는 의도적으로 스승과 다른 장르를 택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훗날 한국 화단을 휩쓴 수묵실험이나 추상미술의 흐름에 동조하지 않은 것도 결국 이러한 가르침과 맞닿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박노수는 ‘선소운’으로 ‘제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1955)에서 동양화 부문 최초로 대통령상(대상)을 받았고, 이는 당시 스물여덟 살의 박노수가 화단에서 큰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됐다. 국전 수상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1949년 제1회 국전에서 입상했고, 1953년 제2회 국전에서는 국무총리상을 받은 바 있다. 박노수는 1981년까지 진행한 30회의 국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출품하며 화단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다.
그렇다면 박노수는 ‘선소운’에서 ‘여운’을 어떻게 구현했을까. 어디선가 들려오는 가락에 귀 기울이는 여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피리를 부는 이가 누구일지, 그 소리는 어떤 음색일지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화면에는 그러한 상상을 담아낼 만한 충분한 여백이 있다. 바로 이 상상과 여백의 공간이야말로 당시 박노수가 이해하고자 했던 ‘여운’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미대 등서 36년간 후학 양성 “독창적 한국화” 강조
박노수는 자신이 어렵게 터득한 한국화의 정수를 후학에게 전하는 데도 애를 썼다. 대학 시절 중학교 미술강사로 시작한 그는 동흥중·고, 성동중·고, 서울사범학교, 이화여대, 서울대 미대 등에서 36년 동안 교육을 이어갔다. 박노수는 자신이 그러했듯, 스승으로부터 한국화의 정신적 기초를 배우되 작품에서는 반드시 독창성을 발휘할 것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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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수의 ‘조어’(1982). 전통을 놓지 않되 고루하지 않은 그림. 현대적인 감각으로 한국화를 표현했다는 평가가 따르는 화백의 무기는 수묵에 스미듯 녹여낸 색에 있다. 섬세한 필선 사이에 즐겨 사용한 맑은 군청색을 선염(화면에 물을 칠하고 마르기 전 물감을 얹는 기법)으로 얹어 몽롱하고 침중한 맛을 냈다. 작품 속에 등 보인 노인은 오히려 몸을 가장 작게 만든 채 고즈넉하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1980년대 화백의 감각적인 산수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종이에 먹·색, 99.5×143.5㎝.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컬렉션) 소장. |
1982년에야 교수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작품활동에만 전념했는데, 그래서 이즈음을 그의 화풍이 정점에 이른 시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후기 박노수의 작품은 색을 배제한 인물화가 아닌, 그의 대표색으로 꼽히는 군청색이 시원하게 깔린 산수화가 주를 이룬다. ‘조어’(1982)처럼 푸른 자연 속에서 한가롭게 물고기를 잡는 유유자적한 장면이 많다. 젊은 시절에 그렸던 ‘선소운’에서 보여준 날카로운 선 대신 구름처럼 부드러운 붓놀림이 화면에 선선한 느낌을 더한다. 소재, 색감, 필획 모두 이전과는 다르다. 어떤 속박이나 규칙에서 벗어난 노년의 화가만이 구현할 수 있는 완숙하고 자유로운 세계다.
서울 종로구에는 박노수의 이름을 간직한 미술관이 있다. 원래 대한제국 대신이던 윤덕영이 일본에 나라를 팔아 받은 거액으로 자신의 딸을 위해 지은 집이었다. 훗날 박노수가 매입해 1000여 점이 넘는 작품과 함께 서울시에 기부하고 2011년 종로구가 인수하면서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이 됐다. 불과 몇 개월 차이로 화가는 개관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유산 덕분에 오늘도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는다. 그의 그림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화폭에 스민 깊은 여운을 마주한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