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카프카' 크르지자놉스키의 문자 거부하기

13 hours ago 2

일찍이 시작된 생각의 모험

이 작가의 이름과 성은 발음이 좀 어렵다. 시기즈문트가 이름이고 크르지자놉스키는 성이다. 이 성의 실제 발음은 더욱 복잡하다. 크르쥐좌노f스키에 가깝다. 이름이 이렇게 낯선 느낌을 주는 것은, 그가 지금의 우크라이나에 살던 가톨릭교도 폴란드인 가정에서 태어나 러시아어로 활동한 소비에트 작가여서다. 소설가이자 극작가, 연극이론가, 번역가였던 시기즈문트 도미니코비치 크르지자놉스키는 1887년 2월 11일 키예프(키이우) 근처 데미우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김나지움 5학년 때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에 몰두했던 자신의 이력을 짧은 자서전에서 밝힌 바 있다. 손에 초콜릿을 들고 침대에 앉아 주관과 객관에 대한 문제를 스스로 풀기 전에는 절대로 초콜릿을 먹지도, 불을 끄지도 않겠다고 자신에 다짐했다는 것이다. 강박에 가까울 정도의 철학적 집착에서 그를 구원한 것은 집 서가에서 발견한 셰익스피어의 희곡이었다. 엄밀히 말해 칸트와 셰익스피어 사이의 논쟁이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고 철학적 질문을 소설의 재료로 삼아 “생각의 모험”을 떠나는 방식으로 대답을 우회했다.

이후 키예프대학 재학 시절인 1912년에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 문학 활동을 시작했는데 적군(赤軍)에 복무하던 1918년의 일화는 그의 문학적 몰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보초를 서던 크르지자놉스키는 소총을 내려놓고 배우가 무대를 서성이듯 라틴어로 베르길리우스를 낭송하다가 당시 키예프 군대 위원이었던 혁명가이자 작가인 세르게이 므스티슬랍스키에게 발각되었다는 것이다. 므스티슬랍스키는 징계를 내리는 대신 이 젊은이와 사귐을 갖는다. 훗날 크르지자놉스키가 생계의 어려움을 겪을 때 백과사전 편찬일을 주선하며 도움을 준 이가 바로 그다.

시기즈문트 크르지자놉스키. / 이미지 출처. © bookmatejournal

시기즈문트 크르지자놉스키. / 이미지 출처. © bookmatejournal

다른 차원과 다른 시간에서 온 소설

생전에 이미 동시대 작가들의 작가로, 최고의 셰익스피어 전문가로, 기이한 천재로 이름난 그였지만 생전에 자기 작품의 출간을 그는 보지 못했다. 첫 번째 책의 출간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9년 후인 1989년에야 이루어졌다. 러시아에서 출간된 후 그의 작품들은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여러 유럽 언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러시아 밖에서는 그를 “러시아의 보르헤스”, “러시아의 카프카”라고 칭했고 그의 글에 대해서는 우아하고 지적이며 존재의 신비에 가닿게 한다는 평이 뒤따랐다. 확실히 그가 직조하는 이야기들은 낯선 비유로 밀도 높은 아름다움을 풍성히 쌓아나간다. 그러나 늦게 도착한 만큼 그는 여전히 장막에 가려진 작가다.

‘작가’로서 그의 작업 기간은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반에 한정된다. 이후엔 말 그대로 생계를 위해 백과사전 편찬일이나 폴란드어 번역일, 연극 무대의 다양한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하며 시대를 통과했다. 문학적 격동의 시기인 1920년대에 모스크바로 이주한 소비에트 작가 세대에 속하는 그는, 같은 세대의 미하일 불가코프, 유리 올레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등에 비해서도 더더욱 잊힌 사람이었다. 시대에 어울릴 수 없었던 자신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나와 편한 사이가 아니지만, 영원은 나를 사랑한다.” 그의 작품들은 매우 지적인 이야기들이지만 쉽게 빠져들어 읽게 된다. 21세기식 판타지-심리극이라거나 미스터리-추리극이라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중편 『문자 살해 클럽』, 『뮌하우젠의 귀환』, 『미래에 관한 회상』, 단편 「크바드라투린」, 「틈 컬렉터」 등 작가의 최고 작품들이 줄줄이 생산되었지만, 그의 원고들은 “부적합” 판정을 받으며 차례로 반환되었다. 그는 오페라와 영화 및 광고 등 광범위한 분야의 글을 썼고 강연과 낭독회를 계속 이어갔으나, 구상했던 긴 분량의 작품들은 1930년대까지 끝내지 못하고 미완성 상태로 남게 되었다. 크르지자놉스키의 소설에 반소비에트적인 것이나 선동적인 것은 없었다. 동시에 그의 텍스트는 전혀 소비에트적이지 않았다. 그의 소설은 완전히 다른 차원과 다른 시간에서 온 것이었다. 플롯의 기본을 평범한 일상에서 가져오는 크르지자놉스키에게는 평범한 것으로부터 역설을 보고 그것을 뒤집어 보이기 위해 철학이 필요했다. 그는 장르를 능숙하게 혼합해서 판타지-심리 드라마나 모험담-풍자극을 직조해냈다.

오디오극 '크바드라투린' 포스터. / 이미지 출처. vkcom

오디오극 '크바드라투린' 포스터. / 이미지 출처. vkcom

문자 이전의 세계

『문자 살해 클럽』은 작가의 자전적 체험으로부터 출발한다. 객지 모스크바에서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던 크르지자놉스키는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고향으로 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진 것을 전부 팔아야 했다. 읽고 쓰는 사람에게 책이란 거의 전부였겠지만 서가를 싹 다 비워야 했다. 장례를 치르고 모스크바로 돌아왔는데 기억력이 얼마나 비상했던지 그는 무슨 책 몇 페이지 몇 번째 줄에 어떤 문장이 있었는지 줄줄 외웠다고 한다. 출판된 책이 거의 없는데도 그가 작가들의 작가로 이름을 날린 이유도 그가 여는 낭독회나 강연 때문이었다. 거기서도 그는 길고 복잡한 문장들을 암송하곤 했다. 『문자 살해 클럽』의 등장인물도 그런 사람이었지만 한발 더 나아가 그는 아예 문자를 거부하기로 한다. 문자화되지 않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구상의 왕국을 꿈꾼 것이다.

『문자 살해 클럽』 표지. / 이미지 출처. book24.ru

『문자 살해 클럽』 표지. / 이미지 출처. book24.ru

‘나’는 ‘그’를 방문한다. ‘그’는 ‘나’에게 “익사자 위로 피어나는 거품”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소리를 한다. 그는 말하자면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 속 주인공과 같은 인물이다. 이어 그는 나름대로 자기가 읊조리듯 내뱉은 말에 대한 해설을 이어간다. 글자는 삶을, 생명을 삼키면서 태어나고 자란다는 것이다. “만약 도서관 서가에 책 한 권이 더 놓인다면 그건 실제 삶에서 한 사람이 줄어든다는 얘기라오. 서가와 세상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세상 쪽이요. 거품은 밝은 데로 뜨고, 자신은 바닥으로 꺼진다? 아니, 고맙지만 나는 됐소.”

어머니의 장례에 참석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책을 다 팔아버린 그는 텅 빈 서가를 바라보다 환상처럼 떠다니는 단어 파편을 목격한다. 그는 그것으로부터 ‘구상’을 붙잡아 필사에 성공하고 세상에 이름을 얻었었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펜촉에 혹사당한 환상은 그에게 어떤 구상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고, 이에 그는 문자를 거부하고 순수한 구상의 세계를 가꾸기로 했다는 것이다.

우연한 방문으로 생각했던 나에게 그는 자신의 토요 정기 모임에 참관인으로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그 모임은 ‘문자 살해 클럽’이고 거기서 그는 제즈라고 불리며 의장 역할을 한다. 그가 소개하는 다른 구성원들의 이름도 기괴하다. 다스, 튜드, 히그, 쇼그, 페브, 라르. 제즈는 그 이름들이 의미 없는 소리의 나열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후 토요 모임은 5주에 걸쳐 진행되며 매주 한 명의 구성원이 돌아가며 문자화되지 않은 이야기를 구술한다.

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지역에 한정되는 것과 지역을 초월하는 것,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얕은 것과 깊은 것이 검고 텅 빈 서가가 놓인 비밀 장소를 배경으로 촘촘하게 얽힌다. 작가는 나아가 공간과 시간 개념까지 마법사처럼 능숙하게 변형해나간다. 그가 빚는 이야기는 그 시작과 끝이 너무 갑작스럽고 독자가 서 있는 현재 위치의 좌표조차 뒤흔들어버리기에 독자는 곧 심연으로 추락한다.

삶과 죽음 사이를 떠도는 발화(發話)

요즘 식으로 극화하기에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셰익스피어 연극에 관한 온갖 인물들이 등장해 극작론, 캐릭터 연구, 연기론 등을 종횡무진 펼치는 2장 「악투스 모르비」는 마치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존 말코비치 되기>식의 정신분석 보고서를 보는 것 같고, 중세 축제를 모티브로 삼아 이성과 광기의 단순 대비를 뛰어넘어 골리아드라는 ‘광대-성직자 복합체’를 전면에 내세운 3장의 「당나귀 축제」와 「골리아드의 자루」는 마르키 드 사드의 영향을 받은 듯 자유주의, 유물론, 무신론, 아나키즘적 요소를 두루 포함한다.

또, 4장의 신체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하는 진동 세포를 기반으로 세상을 기계화하는 과학자와 정치가가 등장하는 「엑스」 이야기는 영국의 디스토피아 SF 앤솔로지 <블랙 미러> 시리즈를 연상케 할 만큼 소재나 묘사 면에서 현대적이다. 입의 존재 목적을 두고 언쟁을 벌이며 답을 얻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친구들을 다루는 5장은 요즘 시도되는 ‘다시 쓰는 (잔혹) 동화’ 같고, 6장의 「오볼 이야기」는 ‘죽은 이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내지는 “둘은 죽음과 삶 사이에 머물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니, 마치 우디 앨런의 <스쿠프>의 한 세기 전 버전을 보는 것만 같다.

크르지자놉스키가 극본을 맡은 연극 '목요일이었던 남자' 공연 장면. / 이미지 출처. godliteratury.ru

크르지자놉스키가 극본을 맡은 연극 '목요일이었던 남자' 공연 장면. / 이미지 출처. godliteratury.ru

그중 두 번째 이야기(문자 없는 책)의 제목은 「당나귀 축제」인데 중세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프랑수아즈라는 아름다운 처녀의 결혼식과 가톨릭/이교도 문화가 혼재하는 당나귀 축제의 혼란을 묘사하면서 성과 속의 구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가 싶더니 속편 격으로 이어지는 「골리아드의 자루」에서는 작가가 “광대-성직자 복합체”로 명명한,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제라는 이른바 중세 아웃사이더 사제인 골리아드의 고뇌를 통해 뿌리 뽑힌 삶의 역설을 전한다. “가장 순결하고 가장 고결한 것이 한순간이라도 더럽혀지고 추락함이 마땅하리라. 순수한 것이 순수함을, 높은 것이 높음을 달리 어찌 배울 수 있겠는가.”

크르지자놉스키가 (바깥 이야기와 다섯 편의 안쪽 이야기들에서) 골몰했던 것은 기존 사회 질서에서 소외된 자들이 삶의 정수를 향해 돌진하여 질문하고 끝끝내 좌절한 이야기다. 글자 없이 ‘말해진’ 이 작품 한 권, 한 권은 공교롭게도 주인공들의 ‘죽음’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울처럼, 실제 세계에서도 ‘작가’ 한 명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들은’, 즉 ‘소리로 읽은’ ‘나’의 다음과 같은 고백이 다른 차원의 가능성을 연다.

“그리고 받아쓰기가 시작되었다. (…) 이제 저들의 뜻이 이루어졌으니 나는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 그렇다.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이 원고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말은 사악하고 집요하다. 누구든지 말을 한 입 베어 물고자 하는 사람은 말을 죽이기는커녕 곧 말에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 짧은 순간에 불과했을지라도 이로써 나는 궤도를 이탈해 ‘나’를 넘어설 수 있었다. 이제, 말들을 돌려주려 한다. 전부, 단 하나만 제외하고. 그 하나는 바로 ‘삶’이다.”

결국, ‘그(들)’의 생이 저물고 발화되었던 소리는 문자로 안착한다. 문자화함으로써 삶이 남는다. 시간의 덜미를 잡고 삶은 다른 차원의 ‘있음’을 시작한다.

시기즈문트 크르지자놉스키. / 이미지 출처. fb.ru

시기즈문트 크르지자놉스키. / 이미지 출처. fb.ru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