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으면 망한다" 말렸지만…승부사의 '통 큰 베팅' 통했다 [반도체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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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 반도체 담당 기자들이 온라인 코너 '반도체 포커스' 연재를 시작합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한국 반도체 대기업과 엔비디아 등 외국계를 담당하는 산업부 전자팀, 반도체 최신 기술을 취재하는 테크&사이언스부 테크 담당, 중소기업부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담당 기자가 함께합니다. 국내외 반도체 산업 생태계 곳곳에서 발생한 뉴스를 한경 만의 관점을 담아 전해드립니다.

'대한반도체(1976년) → 금성일렉트론(1989년·LG반도체로 1995년사명변경) → 현대전자(1999년) → 하이닉스반도체(워크아웃 2001년 ) →SK하이닉스(2012년)'

SK하이닉스는 내년 창립 50주년을 맞는다. 모태는 1976년 설립된 대한반도체다. 이후 주인이 4차례 바뀌었고, 주인없는 신세로 10년간 서러움도 겪었다. 사명은 6차례나 바뀌었다. 그만큼 부침이 컸다.

SK하이닉스는 2012년 3월 공식 출범했다. 최태원 SK 회장이 지난 2012년 3월26일 경기도 이천 본사에서 SK하이닉스 출범식에서 직원에게 행복날개 배지를 달아주고 있다.(왼쪽 사진) 최 회장은 이날 출범식에서 세계 최고 반도체 회사로 도약하기 위한 새 출발을 선언했다. (오른쪽 사진)

SK하이닉스는 2012년 3월 공식 출범했다. 최태원 SK 회장이 지난 2012년 3월26일 경기도 이천 본사에서 SK하이닉스 출범식에서 직원에게 행복날개 배지를 달아주고 있다.(왼쪽 사진) 최 회장은 이날 출범식에서 세계 최고 반도체 회사로 도약하기 위한 새 출발을 선언했다. (오른쪽 사진)

그런 회사가 올 1분기 기준 사상 처음으로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왕좌(시장점유율 36%)에 올랐다. 반도체 업계에선 "반신반의했는데 '설마가 현실이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SK하이닉스의 성공은 시대의 흐름을 잘 탄 우연의 결과일까.

고 구본무 LG 회장이 키웠지만...'빅딜'로 넘어가

SK하이닉스의 전신은 1976년 대한전선이 설립한 대한반도체다. LG그룹은 1989년 대한반도체를 그룹에 편입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고(故) 구본무 LG 회장이 그룹의 미래 성장동력으로 반도체를 낙점한 것. 이후 LG반도체는 LG의 전폭적 투자 하에 D램 시장에서 한 때 글로벌 6위까지 치고 올라서며 삼성전자를 위협했다.

회사에 위기가 불어닥친 건 1998년부터다. 1997년 외환 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 체제가 되자 당시 김대중 정부에서 재벌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빅딜' 정책을 추진하면서 LG반도체는 현대그룹의 현대전자로 넘어갔다. LG반도체에 애정이 컸던 구 회장은 혼자 통음하며 울분을 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수 1년 만에 유동성 위기에 봉착했다. 현대전자가 LG반도체의 부채를 전부 떠안은데다, 그룹 '왕자의 난' 등이 겹치면서다. 결국 현대전자는 2001년 채권단 체제에 돌입하게 됐다. 반도체는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한 뒤 하이닉스반도체로 사명을 변경했다.

하이닉스는 주인없는 신세로 무려 10년을 버텨야만 했다. 부실한 재무구조와 불투명한 사업 환경으로 누구도 인수자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하이닉스는 이 때 지금의 메모리 사업 중심의 경영 기반을 마련했다. 매그나칩반도체 등을 분사하고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집중하는 전략을 선택한 것. 때 마침 반도체 업황이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하이닉스 실적도 개선 조짐을 보였다.

다 말렸지만...최태원 회장의 '통 큰 베팅' 통했다

그렇게 2011년 시작된 매각 작업에서 통 큰 베팅을 한 게 바로 SK다. 인수 규모만 3조4000억원에 달했다. 최태원 SK 회장은 당시 그룹 내부에서 "인수하면 망한다"는 강한 반발까지 나왔음에도 미래 성장 동력 확보를 위해 인수를 밀어부쳤다.

최태원 SK회장의 SK하이닉스 인수 후 첫 현장 행보. 최 회장이 2012년 경기도 이천의 SK하이닉스 내부 구내식당에서 임직원들과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최태원 SK회장의 SK하이닉스 인수 후 첫 현장 행보. 최 회장이 2012년 경기도 이천의 SK하이닉스 내부 구내식당에서 임직원들과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SK하이닉스.

2012년 출범한 SK하이닉스는 빠른 속도로 경영이 안정화됐다. SK의 전폭적인 투자와 함께 2013년 일본 반도체 기업 엘피다의 파산 등으로 인한 글로벌 경쟁 환경이 급변한 결과였다. SK하이닉스는 SK그룹에 편입된 지 이듬해인 2013년 연간 매출 14조원을 달성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하이닉스 인수 역시 SK의 '신의 한 수'로 재평가됐다.

30여년간 반도체 업계에 종사해 온 한 관계자는 "SK하이닉스 문화 자체가 수많은 위기를 겪다보니 다른 어떤 위기가 오더라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잡초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며 "오늘날의 SK하이닉스는 수많은 실패와 역경를 통해 다져진 내공 덕분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SK그룹 인수 이후 D램 2등 자리를 지키며 실력을 키웠다. 2020년대 들어 SK하이닉스를 메모리 반도체 왕좌 자리에 올린 건 바로 고대역폭메모리(HBM)다. 현재 SK하이닉스 전체 매출 중 HBM 비중이 절반에 이른다.

2009년 시작한 HBM...10년 버티며 실력 쌓아

2022년 11월 챗GPT 출시로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일반 D램보다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HBM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다. SK하이닉스는 그 해 6월 세계 최초로 4세대인 HBM3을 양산해 엔비디아에 납품했다. 지난해엔 5세대인 HBM3E 8단, 12단도 업계 최초로 양산에 성공해 엔비디아에 납품하는 등 세계 최초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AI 산업이 급부상할 것을 예상하고 HBM을 개발했던걸까.

하이닉스가 HBM 개발을 시작한 건 SK에 인수되기 전인 무려 16년 전인 2009년이다. 당시 하이닉스는 그래픽카드에 탑재할 고성능 D램을 만들기 위해 팹리스(반도체 설계) 기업인 AMD와 함께 HBM 개발에 나섰다. 실제 제품이 나온건 2013년이다. 업계의 반응은 싸늘했다. 고난도 패키징 공정을 거쳐야해 수율이 낮은데다, D램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싸 수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그럼에도 투자를 지속했다. 2세대(HBM2), 3세대(HBM2E) 제품을 개발하면서 차곡차곡 기술력을 쌓았다. 기다리면 때가 온다고 했던가. SK하이닉스가 4세대 HBM3 세계 최초 개발 타이틀을 따냈던 2022년, 그 해 불어닥친 AI 열풍과 맞물리면서 SK의 HBM도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 때를 기점으로 SK하이닉스 HBM은 이제 없어서 못파는 제품이 됐다. 올해 HBM 물량은 지난해 이미 완판됐고, 내년도 물량도 올 상반기 중 판매가 끝날 것으로 예상된다.

SK하이닉스의 HBM3E 16단 최신제품. 지난해 11월 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SK AI 서밋 2024에 SK하이닉스의 HBM3E가 전시돼 있다. SK하이닉스

SK하이닉스의 HBM3E 16단 최신제품. 지난해 11월 4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SK AI 서밋 2024에 SK하이닉스의 HBM3E가 전시돼 있다. SK하이닉스

HBM 개발은 SK 그룹 차원의 대대적 투자와 지원 덕분에 가능했다. SK는 2015년 미래비전을 선포하면서 경기도 이천 M14 라인 증설 등 에 46조 원을 투자하는 등 메모리 반도체 사업 확장에 올인했다. 이같은 투자가 없었다면 SK의 HBM은 없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는 앞서가던 삼성전자와 다른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기 위해 그룹 차원에서 HBM 개발에 사활을 걸었다"며 "그렇지만 당시 D램 업황이 최절정기였고 HBM의 미래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폭적인 투자 결정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2020년 단행한 88억4400만 달러(당시 환율로 10조2000억원) 규모의 인텔의 낸드사업부 인수는 SK하이닉스 낸드플래시 사업에 획을 그은 전략적 투자 결정으로 평가된다. 인텔 낸드 사업 인수는 한국 반도체 기업 역사상 최대 규모의 M&A였다. 하이닉스 인수를 통해 반도체 사업을 그룹 대표 사업으로 키워낸 최태원 회장의 승부사적 기질이 또 한번 빛을 발한 셈이다.

솔리다임도 처음부터 상황이 좋았던 건 아니다. 인수 초기만 해도 1조원 넘는 적자를 지속하면서 '무리한 인수'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그러나 지난해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수요가 폭발하면서 솔리다임은 지난해 흑자전환에 성공하면서 성공한 M&A로 재평가되고 있다.

김채연 기자 why2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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