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꽃 피는 정원에 한국 美가 꽃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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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꽃 피는 정원에 한국 美가 꽃피었다

가장 한국적인 정원은 어디일까. 흔히 창덕궁 후원, 창경궁 후원 등 궁궐의 정원을 떠올린다. 사대부나 일반 서민의 소박한 정원 모습은 쉽사리 생각나지 않는다. 창밖의 자연을 실내로 빌려오는 ‘차경’이 한국 정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한국 정원은 사실 그 맥이 끊겨온 건 아닐까.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정원을 가꿀 여력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세계적인 정원을 만든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우리 선조의 정원이 남아있다면 어떤 형태일까. 이달 초 문을 연 경기 양평의 ‘메덩골 한국정원’은 이런 물음에 답을 주는 장소다.

한국의 미학·철학을 담다

메꽃 피는 정원에 한국 美가 꽃피었다

한국인의 미학과 정신, 철학이 담겨 있는 한국정원은 총 세 개의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제일 먼저 ‘민초들의 숲’으로 불리는 공간은 한국인 정서가 담긴 숲을 되살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라는 가사로 잘 알려진 ‘고향의 봄’이 모티브가 됐다. 민초들의 숲에는 봄이면 복숭아꽃과 진달래가 피고, 여름에는 산수국이 만발한다. 녹음과 정취는 말 그대로 푸짐한 덤이다.

숲의 끝에는 남도 돌담길이 있다. 영화 ‘서편제’ 속 청산도 남도길을 닮았다. 돌담길 사이마다 목화, 벼, 고추, 가지 등이 심겨 있다. 아주 평범한 일상의 밭작물이 특별함을 지니는 정원수가 된다. 벼락을 맞아 반으로 갈라진 회화나무는 동네를 지키던 서낭당 나무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고샅

고샅

돌담을 따라 걷다 보면 빨래터를 형상화한 개울이 나온다. 산속의 자연스러운 개울로 보이지만 그 역시 한국적 분위기를 살려 조성된 인공 개울이다. 수석 전문가가 어울리는 돌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고, 트럭 300대 이상의 돌을 가져와 자연스러운 개울을 만들었다. 개울을 지나면 ‘선비의 풍류’라는 두 번째 공간이 시작된다. 한옥 ‘파청헌(把靑軒)’에 올라 대청마루에 앉으면 한국정원 너머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파청헌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 ‘앞산의 푸르름을 잡았다’는 뜻이다.

파청헌을 뒤로하고 걸어가면 길 끝에서 용반연(龍返淵)을 만나게 된다. ‘용이 돌아온 연못’이라는 뜻. 입신양명에 성공한 선비가 고향으로 돌아온 모습을 뜻한다. 맑은 물 안에는 버들치와 산천어가 떼 지어 다닌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치지 않고 정원을 가꾸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연못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두꺼비 모양의 바위 ‘서섬암(瑞蟾巖)’이 듬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재예당에서 본 원주암

재예당에서 본 원주암

선비의 풍류에서 하이라이트 공간은 ‘재예당(載藝堂)’이다. 재예당 마당에는 꽃 한 송이 없이 향나무가 심긴 ‘원주암’ 하나만 놓여 있다. 마치 화선지 위에 점 하나를 찍어낸 것 같은 모습이다. 여백의 미를 느끼고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다. 원주암은 뭍에 올라와 앉은 물고기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자체로 자신의 한계를 넘는 창조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한국인의 정신’이라는 세 번째 공간은 경주 솔밭과 함께 시작한다. 이곳은 한국인의 정신 기저에 영향을 준 성리학, 불교, 샤머니즘을 모티프로 한 정원이다. 소나무 숲 사이로는 경주 최부자 집안의 마지막 부자인 독립운동가 최준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 ‘문파(汶波) 샘길’을 만들었다. 경주 최부잣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솔밭과 샘길로 표현한 셈이다.

승효상 선곡서원

선곡서원은 안동 병산서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건물로 선화(旋花, 메꽃의 한자 이름)가 피어 있는 골짜기, 즉 메덩골에 있는 서원을 뜻한다. 선곡서원 제일 앞의 취병루에 오르면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경치에 취하게 된다. 그 앞으로 보이는 돌 정원은 류성룡 선생과 그의 제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불교를 품은 작은 암자 ‘경외암(逕外庵)’을 만나게 된다. ‘이 세상 밖에 있는 암자’라는 의미다. 운곡 선생의 시구 ‘꽃길 밖에는 눈발이 흩날리고’에서 따왔다.

한국정원은 면적만 2만3000㎡에 달한다. 둘러보는 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하지만 세계적 정원을 꿈꾸는 메덩골정원(총 20만㎡ 규모)은 아직 진행형이다. 한국 역사와 니체 철학을 담은 현대정원은 내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 중이다. 사업을 계획한 지 14년 만이자 설립자의 사재 1000억원 이상이 투입된 결과다.

양평=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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