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투자 주도한 靑 "기업이 결단"…野 "정부 개입으로 억지 결정"

2 hours ago 6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29일 총 800조원을 투자하는 반도체 클러스터 계획을 발표했지만 여전히 정치권을 중심으로 의구심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인적·물적 자원이 갖춰지지 않은 광주 등 서남권으로 정한 점, 사실상 정부가 주도한 점 등에서 말이 나온다. 정부가 나서서 입지 선정과 경쟁 관계에 있는 두 기업의 동시 발표를 이끌어낸 건 사실상 1970~80년 산업화 시기 이후 전례를 찾기 어렵다는 평가다.

◇靑 주도 ‘800조원 반도체 프로젝트’

<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후보지 >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유력 후보지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광주 첨단3지구 일대. 광주 북구·광산구와 전남 장성군 일대에 걸친 광주 첨단3지구는 약 362만㎡의 대규모 일반산업단지로, 첨단 기업을 중심으로 연구시설과 주거 기능을 결합한 복합도시로 조성 중이다. /광주매일신문 제공

<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후보지 >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유력 후보지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광주 첨단3지구 일대. 광주 북구·광산구와 전남 장성군 일대에 걸친 광주 첨단3지구는 약 362만㎡의 대규모 일반산업단지로, 첨단 기업을 중심으로 연구시설과 주거 기능을 결합한 복합도시로 조성 중이다. /광주매일신문 제공

삼성·SK가 광주 등 서남권에 80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전공정 팹(fab) 4기를 신규 건설하겠다는 계획은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발표됐다.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했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투자 계획을 직접 공개했다. 대기업 총수가 대통령을 만나 고용 창출과 국내 투자 확대를 약속하는 건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처럼 구체적인 투자 계획을 총수가 대통령 앞에서 직접 꺼내놓는 건 드물다.

삼성과 SK의 대규모 투자 동시 발표는 청와대가 주도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이번에는 다르다”며 고성능 반도체를 필요로 하는 인공지능(AI) 수요가 ‘비가역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이 같은 예측을 전제로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해 온 국가주도 성장론이 이번 호남 반도체 투자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다. 실제 첨단 전략산업을 놓고 미국·중국 등 선진국은 국가 대항전을 벌이고 있다. 이 대통령은 “글로벌 AI 전쟁은 총력적인 동시에 국지전”이라며 “국가적 대경쟁의 전선이 무한히 확대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청와대가 나서서 특정 지역 투자를 사실상 유도한 건 기업에 상당한 압박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있다. 경제계 관계자는 “투자 의사결정 주체는 전적으로 기업”이라며 “정부는 기업 결단을 측면 지원하는 형태의 산업 정책이 자리잡아야 한다”고 했다. 정점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서로 경쟁하는 두 대기업이 동시에 같은 입지에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한다는 것 자체가 관치 개입에 따른 억지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강훈식 청와대 비서실장은 “반도체 수요가 엄청나게 커지는데 기업 팔을 비틀어서 투자하게 한다는 건 사정을 전혀 모르는 비판”이라고 반박했다. 서남권 부지도 기업이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호남行 두고도 갑론을박

이재명 정부는 정권 출범 초반부터 서남권 재생에너지 활용을 고민해왔다. 이른바 ‘지산지소(地産地消)’ 원칙에 따라서다. 해상풍력·태양광으로 생산한 에너지를 해당 지역에서 쓰도록 해야한다는 논리였다. RE100(재생에너지 사용 100%) 전략과 함께 지역 균형발전을 도모하겠다는 정책 목적도 있었다.

여기에 최근 반도체 초호황 국면이 전개되면서 서남권 투자 논의가 정부 차원에서 급물살을 탔다. 정부는 삼성 등 주요 대기업에 서남권 투자를 강하게 독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계 관계자는 “정부도 반도체 팹 자체를 서남권에 유치할 생각은 못했을 것”이라며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면서 아예 팹 유치로 방향이 전환됐다”고 했다.

하지만 전력·용수 문제를 둘러싼 쟁점은 여전하다. 여기에 일각에서는 공정성 문제까지 제기된다. 반도체 투자 유치 과정에 공모 절차가 빠졌다는 지적이다. 유승민 전 의원은 “‘왜 호남인가’에 대한 답이 없다’”며 “지역간 공정한 경쟁을 위한 공모절차나 유치 경쟁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실제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 투자를 결정할 때 주요 주(州)가 각종 인센티브를 제시하는 ‘공개 구애’를 벌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기업이 선택한 부지를 반도체 클러스터로 지정해달라고 신청을 하면, 다른 지역에서도 접수를 받아 공모 절차를 거칠 것”이라고 했다.

◇반도체 수요, 정말 비가역적?

정부가 전제로 하고 있는 ‘비가역적 AI 수요 증가’를 놓고도 업계에서는 의견이 갈린다. 폭발적인 반도체 수요가 한동안 지속될 거라는 데는 이견이 크지 않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수요·공급과 기술 발전에 따라 ‘사이클’을 갖는 반도체 산업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반도체 공장은 부지 조성부터 인허가·기반시설 구축·양산까지 통상 5~7년 걸린다. 수요가 폭증한 뒤 투자 결정을 하면 이미 늦는다. 반도체 업계와 정부가 같은 생각이다. 그럼에도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이 다소 성급한 결정이라는 의견도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올해 초유의 슈퍼 사이클을 누리고 있지만, 불과 3년 전 두 회사 모두 영업 손실을 봤다. 언제든 ‘게임 체인저’ 기술이 등장해 시장을 흔들 수 있다는 평가다. 두 회사가 그간 설비투자 결정에 유연한 태도를 견지해왔던 것도 이런 불활실성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2023년 평택사업장의 5공장(P5) 건설에 착수했지만, 업황이 악화되자 2024년 초 공사를 중단하며 투자 속도를 조절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미 두 회사는 경기 용인시에 총 480조원 이상을 투입한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도 추진 중이다.

한재영/강해령/이현일 기자 jyhan@hankyung.com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