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트랜지스터 발명에서 인공지능(AI) 시대를 이끄는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까지 반도체 기술은 꾸준히 발전했다. 혁신적 반도체 기술은 인류의 역사를 바꾸고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했다. 미래 반도체산업의 혁신 기술은 무엇일까. 업계와 학계에선 실리콘 포토닉스, 극저온 식각, 유리 기판을 활용한 패키징을 꼽는다. SK하이닉스와 한상윤 DIGIST 로봇및기계전자공학과 교수(실리콘 포토닉스), 정진욱 한양대 전기공학과 교수(극저온 식각), 김현재 연세대 전기전자공학과 교수(유리 기판)의 도움을 받아 최신 기술 트렌드를 분석했다.
◇ 빛의 속도로 작동, 실리콘 포토닉스
실리콘 포토닉스는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 위의 실리콘 박막을 정밀하게 가공해 빛이 흐르는 도파로(빛이나 전자기파를 특정 경로로 유도해 전파하는 구조)를 만들고 전자가 아닌 빛을 이용해 보다 빠르게 데이터를 처리하는 기술이다. 도파로에 전압이나 전류를 가하면 굴절률이 변화하면서 빛의 진행 속도가 달라지는데, 이 효과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 기술을 이용해 복잡한 회로를 구성하면 빛을 매개로 하는 고속의 정보처리가 가능해진다. 기존 반도체의 전자회로에선 정보처리를 위해 실리콘 채널을 통해 전자를 흐르게 하고, 전압이나 전류의 변화를 통해 전자의 흐름을 제어한다.
실리콘 포토닉스의 최대 장점은 고속 정보처리 과정에서의 뛰어난 에너지 효율성과 낮은 발열이다. 일반 전자회로는 전자가 이동해 도체 내 원자나 이온의 충돌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정보처리 속도가 높아질수록 에너지 소비와 발열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실리콘 포토닉스는 빛을 이용하기 때문에 이온과 전자의 물리적인 충돌로 인한 에너지 과소비 현상과 발열 등이 발생하지 않는다.
글로벌 반도체업계에선 실리콘 포토닉스가 본격적인 상용화 단계에 들어갔다는 평가가 나온다. 몇몇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에선 수년 전부터 실리콘 포토닉스의 파운드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AI 가속기(AI 학습·추론 등에 특화한 반도체 패키지)를 비롯해, 양자컴퓨팅 시스템, 데이터센터 등 고성능 연산이 필요한 영역에 실리콘 포토닉스가 도입되고 있다. 한 교수는 “실리콘 포토닉스는 기존 전자회로 기반 시스템의 물리적 한계로 지적되는 메모리·프로세서 간 데이터 병목 현상 등을 해결할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리콘 포토닉스 기술은 데이터센터의 ‘서버 랙’ 간 연결, 보드와 보드, 반도체 칩과 칩 사이의 연결 과정에 즉각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 중 상당 부분이 데이터 전송과 발열을 잡는 냉각 등에 사용되는 상황에서 실리콘 포토닉스는 혁신의 시작이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 반도체 공정 한계 극복 극저온 식각
극저온 식각은 반도체 공정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구 온난화 완화에도 기여할 수 있는 혁신 기술로 평가된다. 기존의 식각(웨이퍼의 회로 구성에 불필요한 특정 물질을 제거하는 것) 기술은 웨이퍼를 액체에 담갔다가 건지는 형태의 습식 식각, 플라스마를 활용한 건식 식각으로 나뉜다. 습식은 식각 속도는 빠르지만 자유롭게 움직이는 액체 때문에 정밀도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건식 식각은 고온의 플라스마를 이용하는 과정 등이 매우 복잡하고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단점이 있다.
최근 반도체 공정의 고도화로 고(高)종횡비(폭 대비 높이 비율이 매우 큰 것, 식각 공정에서 고종횡비를 구현하기 위해선 더욱 좁고 깊게 식각을 진행해야 함) 패턴을 식각해야 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플라스마 식각은 고종횡비 패턴 식각을 위해 매우 복잡한 화학반응을 일으켜야 한다. 측면이 식각되는 것을 막기 위한 차단막도 필수적이다. 차단막을 도포하면서 식각을 진행해야 해 식각의 속도가 느려지는 한계가 있다. 이런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등장한 기술이 극저온 식각이다.
극저온 식각은 극저온 환경에서 대부분 물질의 성질이 변화한다는 점에 착안한 기술이다. 영하 80도 이하 극저온 환경을 조성하면 웨이퍼의 성질에도 변화가 발생한다. 물이 영하에서 얼어붙어 표면이 단단해지듯 웨이퍼 표면에도 비휘발성 보호층이 형성된다. 이런 보호층은 별도의 공정을 통한 차단막 형성 없이도 측면 식각을 막아준다.
차단막 도포를 위한 화학 가스를 사용하지 않으니 식각 공정에 사용되는 가스가 단순해지고, 그 덕분에 식각 속도 상승과 수직 모양의 정밀한 식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정 교수는 “극저온 식각을 활용하면 기존 식각 기술 대비 약 3배 정도 더 빠른 식각 속도 덕분에 생산성이 혁신적으로 개선된다”고 설명했다. 극저온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장비 등 설비 확충에 많은 비용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 극저온 식각에서 사용되는 별도의 가스를 공급하는 기업이 현재 많지 않다는 점 등은 해결 과제로 꼽힌다.
유기·실리콘 기판 대체할 차세대 패키징 소재 '유리 기판'…AI 반도체에 필수적
반도체 기술이 고도화됨에 따라 여러 고성능 반도체를 한 칩처럼 작동하게 하는 ‘최첨단 패키징’의 중요성이 커졌다. 고성능 반도체를 배치하는 기판의 소재에도 혁신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 크게 주목받는 건 유리 기판이다. 반도체 유리 기판은 현재 널리 활용하는 유기 기판과 실리콘 기판을 대체할 차세대 패키징 소재로 평가받는다. 김 교수는 “인공지능(AI) 시대를 위한 AI 반도체에 유리 기판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소자와 회로를 물리적으로 받쳐주는 기판은 지지체 구실과 더불어 열을 효과적으로 분산 관리하고, 효율적인 전기 절연과 신호 전달의 매개체 역할까지 담당한다. 그렇다면 기존 기판 대비 유리 기판의 장점은 뭘까.
유기 기판은 에폭시를 도포한 코어에 미세회로를 집적하는 방식이다. 표면이 상대적으로 거칠기 때문에 미세 패턴을 새기기에 불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유리 기판은 표면 거칠기(평탄도)가 10나노미터(㎚·1㎚=10억분의 1m)로 유기 기판(400~600㎚)보다 40~60배가량 평탄하다. 한 반도체 기업은 “유리 기판을 사용하면 유기 기판 대비 10배 이상의 미세한 회로 밀도를 구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실리콘 기판은 높은 평탄도와 열 안정성을 갖춰 고성능 반도체 제조에 유기 기판 대신 채용됐다. 하지만 가격이 비싸고 열전도율이 높다는 단점이 있다. 유리 기판은 실리콘 기판 수준의 평탄도와 상당한 열 안정성을 보이면서도 열전도율이 실리콘 기판보다 150배 정도 낮다. 유리 기판을 쓰면 반도체 칩 전반에 열이 퍼지지 않게 관리하기 훨씬 쉽다.
유리 기판을 사용하면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칩 등을 기판 안으로 내장할 수 있다. 반도체 칩을 더 얇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실리콘 기판보다 저렴해 고성능 반도체 제조에 드는 비용도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유리 기판은 언제부터 본격 활용될까. 유리 기판과 관련해 다양한 기업에서 개발과 생산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 CES 2025에서도 SKC가 공개한 유리 기판이 큰 관심을 끌었다.
유리 기판이 상용화하면 반도체산업에서 큰 변화가 예상된다. 열전도율이 낮다는 특징 덕에 지금까지 발열이 문제가 된 분야에서 큰 폭의 기술 개선을 이룰 수 있다.
최근 메모리 반도체 산업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는 고대역폭메모리(HBM)가 대표적이다. HBM에 유리 기판은 유의미한 솔루션이 될 수 있다. 데이터 전송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을 제어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사용하는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노트북 등의 발열 문제 해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데이터센터 발열 관리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숙제가 없는 건 아니다. 김 교수는 “유리라는 소재 특성상 구멍을 뚫는 과정에서 미세한 균열이 발생하는 등 난제가 남아 있다”며 “이런 난제가 해결되면 AI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것임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황정수 기자/도움말=SK하이닉스 뉴스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