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로벌 백만장자의 국경 간 이동이 가속화하고 있다. 기존 거주지의 세금 부담이 증가하면서다. 런던 등 전통적인 부 중심지의 영향력이 줄고, 아랍에미리트(UAE) 등은 백만장자의 새로운 허브가 부상했다. 이에 따라 글로벌 경제 권력 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백만장자, 올해 가장 많이 국경 넘는다
21일 글로벌 투자 이민 컨설팅 업체 '헨리앤파트너스가 최근 내놓은 '2025년 부의 이동'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유동성 투자자산 100만 달러 이상을 보유한 고액 자산가(High-Net-Worth Individual·HNWI) 14만 2000명이 거주지를 옮길 전망이다. 관련 통계 집계 이래 사상 최고치다. 2023년 12만 명, 2024년 13만 4000명 등 이동 규모가 최근 증가세를 보였다.
이동의 진원지는 '전통적인 부의 수'도 영국 런던이다. 지난 4월 200년 넘게 유지돼온 비거주자 세제 특례가 폐지되면서 영국은 올해 1만 6500명의 고액 자산가(HNWI) 순 유출을 기록하며 세계 1위 관련 유출국이 될 전망이다. 2위 유출국인 중국(-7800명)의 두 배가 넘는 규모다. 사상 처음으로 유럽 국가가 자본 유출 1위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아랍에미리트(UAE)는 9800명의 순 유입을 기록하며 전 세계 부를 빨아들이는 최대 허브로 떠올랐다. 미국(+7500명), 이탈리아(+3600명) 등이 뒤를 이었다. 올해 한국은 2400명의 고액 자산가(HNWI) 순 유출이 예상된다. 영국, 중국, 인도에 이어 전 세계 4위의 부자 유출국이 될 전망이다.
이른바 '관할권 차익거래'를 그 배경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부유층이 국가 간 세금, 규제, 정치적 안정성의 차이를 활용해 자산과 거주지를 최적화하는 전략적 선택이 글로벌 부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스위스의 고액 자산가 전문 관리업체 'UBS 글로벌 웰스'은 "향후 20~25년간 83조 달러 규모로 예상되는 '거대한 부의 이전' 현상과 맞물리면서 이들의 움직임은 국가 간 부의 불균형과 경쟁 구도를 심화하는 핵심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경 간 최적화' 전략의 부상
과거 '조세 피난처'를 찾던 부자의 소극적 행위는 줄었다. 대신 '국경 간 세무·거주 최적화' 또는 '고도화된 자산 계획'이라는 전문적이고 합법적인 컨설팅 영역으로 진화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는 단순히 세율이 낮은 곳을 찾아가는 것을 넘어 상속 계획, 기업 승계, 자산 보호, 글로벌 투자 기회 확보까지 아우르는 포괄적인 설계 과정이다.
과거처럼 단일 국가에 자산과 거주지를 집중시키는 전략으로 부를 유지하기 어렵다. 복수의 국가에 거주권이나 시민권을 확보하고 신탁, 재단, VCC(Variable Capital Company·싱가포르의 가변자본회사) 등 다양한 법적 구조를 활용해 자산을 여러 관할권에 분산해 예측 불가능한 지정학적·제도적 리스크를 헤지하는 전략을 택하는 부자가 늘었다.
RBC 웰스 매니지먼트 유럽의 개인 재산 부문 책임자인 로스 제닝스는 이런 변화에 대해 "사람들의 관점은 점점 더 글로벌해지고 있으며, 기회를 찾아 국경 너머를 바라보고 전문가를 고용하여 이를 실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티 내셔널 뱅크의 브랜든 윌리엄스 동부 프라이빗 뱅킹 총괄은 "억만장자는 일부 국가에서는 필요에 의해 국제화되거나 국경을 넘는 이해관계를 가지려는 동기가 존재한다"라고 설명했다.
세금은 '방아쇠', 불확실성은 '연료'
세제 변화는 고액 자산가(HNWI) 이동을 촉발하는 가장 강력한 '방아쇠' 역할을 한다. 하지만 유일한 변수는 아니다는 분석이다. 이들의 결정에는 경제적 요인 외에도 정치, 사회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가장 강력한 이동 요인은 급격한 증세와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이다. 영국의 비거주자 제도 폐지, 한국의 상속세, 중국의 정치 리스크 심화 등이 대표적이다. 높은 범죄율, 사회적 불안, 자녀 교육 환경 악화 등도 중요한 유출 동인으로 작용한다.
특정 국가로 이주하는 유인하는 긍정적 조건일 수밖에 없다. UAE의 완전 비과세 정책,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정액세(Flat Tax) 제도, 미국의 거대한 자본시장과 기술 혁신 생태계, 싱가포르의 법치주의와 금융 인프라 등이 대표적이다. 안정적인 정치 환경, 높은 수준의 인프라와 삶의 질도 강력한 유인책이다.
영국과 중동의 차이
실제 최근 고액 자산가(HNWI)의 이동은 세제 변화 결과에 가깝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영국에서 발생했다. 영국 정부는 지난 4월 6일부터 비거주자 송금주의 과세를 폐지했다. '거주 기준의 4년 외국 소득·자본이득 100% 면제(4-year FIG regime)'로 전환했다. 이는 직전 10년간 비거주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4년 이후에는 전 세계 자산에 대해 과세하는 방식이다. 특히 상속세(IHT) 범위를 확대해 10년 또는 20년 장기 거주 판정 시 전 세계 자산이 과세 범위에 편입된다. 거주지 이동 후에도 일정 기간 과세권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개편이 추진되면서 런던에 기반을 둔 글로벌 자산가들에게 강력한 이탈 동기를 제공했다.
이탈리아는 작년 8월 '신규 거주자 해외소득 정액과세' 기준을 기존 연 10만 유로에서 20만 유로로 2배 올렸다. 이는 과도한 부자 유입을 조절하고 초고액자산가(UHNWI)를 선별적으로 유치하려는 전략이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 내에서 가장 파격적인 혜택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영국 이탈자들을 흡수하고 있다. 포르투갈은 기존의 광범위한 혜택(NHR)을 종료하고, 작년부터 과학·혁신 인재 중심의 'NHR 2.0(IFICI)'을 도입해 10년 한시 인센티브로 재설계했다. 그리스는 해외소득 정액 10만 유로(최장 15년) 등 대체 과세 옵션을 유지하며 관련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중동은 부자 유치에 더 적극적이다. UAE에는 개인소득세, 자본이득세, 상속세가 없다. 2023년 이후 9%의 법인세가 도입됐다. 하지만 개인 차원의 세금 부담은 사실상 없다. 여기에 골든 비자를 결합해 전 세계 부유층을 공격적으로 유치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프리미엄 레지던시(그린카드)'를 도입하고 개인 근로소득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부자의 유출로 런던의 프라임(초고가) 부동산 시장은 직격탄을 맞았다. 파이낸셜 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 5월 기준 런던 프라임 주택 시장 거래량은 전년 동기 대비 35.8% 급감했다. 매수 희망가 이하의 제안(언더오퍼)은 마이너스 22.3%를 기록했다. 반면 시장에 나온 재고는 11.7% 증가했다. 전형적인 매수자 우위 시장으로 전환됐다는 평가다. 런던 PCL(프라임 센트럴 런던)의 가격은 올 2분기 기준 2014년 정점 대비 22.4% 하락했다.
반면 부자의 이동은 이 지역에서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렸다. 영국의 부동산 컨설팅 업체 나이트프랭크에 따르면 2020년부터 작년까지 두바이 프라임 빌라 가격은 94% 상승했다.
월스트리트의 재배치와 헤지펀드의 이동
글로벌 자산관리(WM) 업계는 부의 이동 경로를 따라 조직과 인력을 재배치하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의 주요 은행들은 중동과 아시아 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J.P.모간은 작년 두바이에 프라이빗뱅킹(PB) 팀을 신설했다. 두바이의 은행은 골드만삭스와 운용 제휴를 맺는 등 자산가 유입지에 맞춘 조직 재편이 활발하다.
헤지펀드 업계에서는 런던에서 두바이로 인력 이전이 가속화하고 있다. ExodusPoint, North Rock 등 주요 헤지펀드의 핵심 운용역 다수가 올해 두바이로 이주했다. 이는 영국의 세제 변화와 두바이의 금융 허브 육성 정책이 맞물린 결과다. 씨티은행의 올해 글로벌 패밀리오피스 보고서에 따르면 패밀리오피스들은 정책 불확실성 대응을 최상위 과제로 꼽으며 아시아와 중동 지역의 채용 및 허브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세수 기반 잠식…국가 경쟁력 좌우
고액 자산가(HNWI)의 이동은 거시 경제에도 영향을 준다. 전통적인 부의 중심지일수록 소수 고소득층에 대한 세수 의존도가 높다. 이런 세수 집중 구조로 고소득층의 거주지 이동이나 소득 변동에 따라 재정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 이런 상황은 각국 정부에게 딜레마를 안긴다. 재원 마련을 위해 부유층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면 부자 이동을 가속할 수 있다. 반대로 세금을 낮추면 재정 건전성과 소득 재분배 기능이 약화할 수 있다.
고액 자산가(HNWI)는 기업가, 투자자, 고숙련 전문가인 경우가 많다. 이들의 이동은 해당 국가의 혁신 생태계와 기업가 정신을 위축시킬 수도 있다. 글로벌 부자 전문 조사업체 뉴월드웰스의 수석연구원 앤드류 아모일스는 "지난 10년간 세계에서 부가 가장 빠르게 성장한 시장 대부분이 투자이민 등 부자 유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나라들"이라며 "부유층의 이주는 새로운 부 창출의 선행지표 역할을 한다"고 분석했다. 반대로 부유층의 유출은 향후 경제 활력 저하의 경고 신호가 될 수 있다.
한국, 세계 4위 백만장자 유출국의 딜레마
올해 한국의 고액 자산가(HNWI) 순 유출 예상 규모는 2400명이다. 작년 대비 두 배 늘었다. 이는 영국, 중국, 인도에 이어 전 세계 4위 수준이다. 고액 자산가(HNWI)의 이탈은 투자 자본 감소, 고급 인력 유출 그리고 장기적인 세수 기반 잠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의 자본 유출을 가속하는 원인 중 하나는 상속·증여세 부담이 꼽힌다. 한국은 현행 법정 최고 상속세율 50%이다. 일본(55%)에 이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두 번째로 높다. 이런 세금 부담 때문에 삼성, 현대자동차 등 국내 대기업 총수 일가도 상속세 납부에 수조 원대 현금을 마련하느라 어려움을 겪어왔다.
미국 금융회사 '에쿼티스 퍼스트'는 "높은 상속세율은 더 많은 부유한 한국인들이 이민을 하고 자산을 해외로 옮기도록 유도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자산운용사 '시페어러 펀즈'도 "한국의 대주주에 대한 과도한 과세가 기업가치 및 지배구조 개선 인센티브와 상충해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원인이 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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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