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왕실 무덤서 10대 추정 어금니 발견…"주인은 삼근왕"

15 hours ago 2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1~4호분 조사 성과 공개
화려한 금 귀걸이·유리 옥 1000여 점 등 출토
"웅진기 초기에도 대내외 정치 체계·교역망 유지"
15세에 사망한 삼근왕, 2호분에 묻힌 왕으로 추정

  • 등록 2025-06-17 오후 2:47:00

    수정 2025-06-17 오후 2:47:00

[이데일리 김현식 기자] 정치적 혼란기로만 여겨져 온 백제 웅진기 전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 열렸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송산리 고분군)’ 능원 북동쪽에 위치한 2호분 무덤에서 금 귀걸이를 비롯한 화려한 유물이 대거 출토되면서다. 이를 계기로 웅진 초기에도 백제의 대내외 정치 체계가 굳건히 유지됐다는 해석이 가능해졌다. 이에 더해 어금니 2점이 함께 출토됨에 따라 무덤의 주인공을 밝힐 실마리도 생겼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조사성과 기자간담회서 공개한 출토유물(사진=국가유산청)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조사성과 기자간담회서 공개한 출토유물(사진=국가유산청)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백제가 공주에 도읍한 475년부터 538년까지 재위한 웅진기 왕들의 묘역이 모여있는 곳으로 201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능원의 북동쪽에 1~4호분과 방단유구, 남동쪽에 무령왕릉과 5·6·29호가 위치해 있다.

공주 왕릉원은 무령왕릉을 제외하고 모두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바 있는데, 이미 도굴된 상태라 관련 자료가 부족했고 무령왕 이외의 웅진기 왕들이 어디에 묻혔는지, 당시 능원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또한 파악할 수 없었다.

이에 국가유산청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는 왕릉이 위치한 송산의 여러 지점에서 고분의 흔적을 확인하기 위한 중장기적인 조사 연구에 나섰다. 이에 따라 2021년 29호분 발굴조사가 진행됐고, 2023년 9월부터 1~4호분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전경(사진=국가유산청)

국가유산청은 17일 서울 중구 한국의집에서 1~4호분 조사 성과 공개 기자간담회를 열고 2호분에서 △청색 유리옥이 달린 길이 6.5cm의 금 귀걸이 △은에 줄무늬를 새기고 금을 도금한 직경 1.9cm, 너비 1cm의 반지 △철에 은을 씌워 장식한 칼 손잡이의 오각형 고리 장식 등을 출토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국가유산청은 “백제 왕실이 이미 높은 수준의 금세공기술을 유지하고 있었음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어 “반지의 경우 경주 황남대총 북분에서도 비슷한 형태가 출토된 바 있어 웅진 초기 백제와 신라의 긴밀한 관계를 미루어 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오각형 고리 장식에 대해선 “앞서 나주와 논산에서도 발견된 바 있어 백제가 지방 수장층에게 하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2호분에서 함께 나온 어금니 2점의 주인공 대해선 치아 교모도를 바탕으로 한 법의학 분석 결과를 토대로 10대 중후반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웅진기 초기 왕인 개로왕의 직계 후손 중 유일한 10대였던 삼근왕이 2호분의 묻힌 왕일 것으로 추정된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삼근왕은 479년 1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울러 국가유산청은 2호분의 주인공이 삼근왕으로 추정됨에 따라 1~4호분에 묻힌 인물들이 개로왕의 직계인 문주왕과 삼근왕을 비롯한 혈연관계에 있는 왕족들로 추정된다는 조사 결과도 발표했다.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이 17일 서울 중구 한국의집에서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1~4호분’ 조사 성과 언론공개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은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한 강한 나라였다. 그러나 문헌기록과 고고학 자료가 부족해서 그 실체에 접근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며 “이번 재조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있고 중요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일제강점기 때 도굴된 상태로 조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웅진기 전반 백제 왕실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대거 확인되었다고 하니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중요한 성과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발굴조사 기간 중 1~3호분에서는 유리 옥 1000여점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 중 황색과 녹색 구슬에 사용된 납 성분은 무령왕릉과 동일하게 산지가 태국으로 분석됐다. 이에 대해 국가유산청은 “당시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교역망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유물”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더불어 국가유산청은 1~4호분이 사전에 수립한 계획에 따라 경사면을 깎아내서 완만하게 조성한 다음, 가장 동쪽부터 순서대로 조성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지하에 만들어진 굴식 돌방무덤이 네 벽이 급격히 좁아져 청장을 돌 한 장으로 덮은 궁륭식 구조로 이뤄져 있고, 내부 벽면에는 모두 석회를 바르고, 바닥에는 30cm 두께로 강 자갈을 채워 넣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공주 왕릉원 2호분 출토 유리구슬, 옥류(사진=국가유산청)
황인호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장이 17일 서울 중구 한국의집에서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1~4호분’ 조사 성과 언론공개회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사진=김태형 기자)

백제의 도읍 시기는 △한성기 △웅진기 △사비기 순으로 이어진다. 웅진기 왕위 계승과 가계도는 △개로왕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순이다. 국가유산청은 “이번 조사 성과를 통해 웅진기 전반기부터 백제가 이미 내부 정치 체계와 대외 교역망을 잘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이를 발판으로 웅진 후반기에 속한 무령왕은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뜻하는 ‘갱위강국’을 선언할 수 있었고, 성왕은 사비로 도읍을 옮겨 한층 성숙한 문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황인호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장은 “앞으로도 백제 왕릉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축적된 성과를 국민과 공유하는 행정을 이어가겠다”고 했다. 어금니 2점의 주인을 특정하기 위한 보다 명확한 검증이 필요해 보인다는 지적에 대해선 “절대적이라고 하긴 어려운 만큼, 필요하다면 DNA 분석 등을 진행하겠다”는 답변을 내놨다.

Read Entire Arti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