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음악에선 울고, 어떤 술에선 말을 잃는다. 블루스를 들으며 들이키는 버번 위스키 한 잔을 떠올린다면 단박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19세기 미국 남부 옥수수밭에서 일하던 흑인들의 삶의 애환을 녹인 게 블루스라면, 켄터키의 옥수수 증류주인 버번의 달고 진한 맛은 살아가는 고통을 견딜 수 있게 마음을 데워준다. ‘한 손엔 마이크, 다른 손엔 버번’이 흔히 뉴올리언스의 블루스 클럽이나 재즈 바 무대에 선 뮤지션을 떠올릴 때의 모습인 건 이런 이유에서다.
콘트라베이스부터 보컬, 색소폰, 오르간, 드럼까지 다섯 명의 뮤지션이 합주를 이어간다. 12마디 구성 속 느릿하고 느슨한 블루스 연주로 어떤 가슴 아픈 사연을 토해낸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여기저기 둘러봐도 버번이 없다. 합주 영상이 걸린 기둥을 바라보는 벽엔 대뜸 흰 곰팡이 핀 메주 사진이 줄줄이 걸려 있다. 메주는 위스키보단 쌀이나 밀로 만든 누룩이 일으키는 발효의 섭리로 완성되는 막걸리와 가깝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연주자들의 영상 옆에 막걸리가 발효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있다.
블루스와 막걸리의 페어링. 부산 망미동의 복합문화공간 F1964에 자리 잡은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벌어지는 정연두(56) 개인전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의 풍경이다. 우리 상식 속 막걸리는 한국인의 리듬이고, 버번은 흑인 음악의 증류된 기억이다. 어떤 피치 못 할 일이 있었길래 블루스와 메주, 막걸리를 한 장소에 묶어 놨을까. 최근 전시장에서 만난 정연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세상 모든 게 썩어 없어진다고만 생각하면 얼마나 삭막하겠어요. 가끔은 상큼한 향을 내는 알코올로 되살아난다는 게 막걸리의 매력이죠. 블루스도 흥겨워서 만든 음악이 아니지만 슬픈 얘기를 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아요. 그런 지점에서 발효와 블루스를 연결해보게 된 거죠.”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로 꼽히는 정연두의 예술은 원래 이런 식이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그는 타인과 만나 대화하고 협업하는 관계적 방법론을 따지면서 예술과 삶을 넘나드는 문지방을 만들어왔다. 다름과 닮음이 공존하는 자연의 섭리를 익살스럽게 전환하는 것.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2007)로 선정되고, 작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30주년 전에 작품을 선보이고, 리움미술관과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 유수의 기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건 바로 이런 톡 쏘는 예술세계가 인정받은 결과다.
정연두의 시선으로 다시 보면 막걸리와 블루스는 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아래로부터 올라온 예술이란 점이 그렇다. 흑인 노동자의 비주류 노동요가 블루스라면, 막걸리 역시 농사 짓는 이들의 농주였다. 보다 주목할 지점은 발효의 시간성이다. 블루스는 고통을 즉각 분출하는 대신 천천히 삭혀야 완성된다. 막걸리 역시 누룩, 물이 하나 되는 보이지 않는 시간을 거쳐야 한다. 귀로 듣는 발효가 블루스라면 입으로 마시는 발효가 막걸리인 셈이다.
정연두는 이 발효의 과정을 시각적 리듬으로 치환했다. 실제로 전시에 흘러 나오는 작품 ‘피치 못할 블루스’는 한국에 정착한 고려인들의 이야기로 만든 곡이다. 핏줄은 막걸리를 즐기는 전통을 공유하는 한국인을 외치지만, 현실은 몇 번의 강제 이주를 거쳐 외국인이 된 안산에 사는 고려인 청소년들의 사연을 엮었다. ‘이유 있는 이동’이 아닌 ‘불가피한 이주’라는 점에서 블루스와 막걸리의 서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블루스와 막걸리의 페어링이 와 닿는 건 이 둘이 구조적 규율 속 벌어지는 즉흥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블루스가 엄격한 구조 안에서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연주를 허용하는 것처럼 막걸리는 일정한 온도와 시간, 재료 조건 아래 발효라는 자율적인 생명 활동으로 만들어진다. ‘피치 못할 블루스’를 합주하는 연주자들이 12마디 구조와 67BPM이라는 조건만 숙지한 채 서울과 미국 보스턴 등에서 따로 연주했다는 배경이나, 전시 뒤편에 걸린 우주의 은하를 찍은 것 같은 사진이 오르간과 퍼커션 연주자가 음악에 맞춰 검은 대리석 위에 아무렇게나 흩뿌린 밀가루라 사실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불가피한 상황과 피치 못할 사정들’이라는 전시 제목과 걸맞게 F1964을 비롯한 부산 전역에서 미디어아트 페스티벌 ‘루프랩 부산’이 열리고 있다는 점도 재밌다. 당초 루프랩 부산을 염두하고 전시가 이뤄진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미디어아티스트 중 한 명인 정연두의 전시가 다채로운 미디어아트를 소개하는 페스티벌의 포문을 열게 됐다. 전시는 7월 20일까지.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