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신화 사이[이은화의 미술시간]〈429〉

7 hours ago 3

1890년 7월, 빈센트 반 고흐는 끝없이 펼쳐진 밀밭에 섰다. 그러고는 눈앞의 풍경을 캔버스에 옮겼다. 검푸른 하늘을 가르는 까마귀 떼, 바람에 출렁이는 황금빛 밀, 어디론가 이어지는 세 갈래 길. 프랑스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그린 ‘까마귀가 나는 밀밭’(사진)은 오랫동안 그의 유작이자 비극적 삶의 끝에서 남긴 유서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익숙한 이야기는 정말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가 믿어 온 대중적 신화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그림은 고흐가 총상을 입기 약 2∼3주 전인 7월 초순에 완성됐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 점을 더 그렸다. 즉, 이 그림은 그의 마지막 절명시가 아니다. 작품의 의미 역시 죽음 하나로 환원할 수 없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는 밀밭을 통해 “슬픔과 극도의 고독”을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이 풍경이 지닌 “건강하고 회복시키는 힘”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뚝 끊어진 세 갈래 길과 까마귀 떼는 불안과 고독을 떠올리게 하지만, 푸른 하늘과 황금빛 밀밭이 부딪치는 강렬한 보색 대비는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대자연의 생명력을 뿜어낸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고흐의 유서가 아니다. 죽음을 그린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삶의 끝에서도 끝까지 세상을 온전히 바라보려 했던 한 화가의 의지에 가깝다. 자신을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도 고흐는 붓을 놓지 않았고, 흔들리는 밀밭과 날아오르는 새들을 끝내 화면에 붙잡아 두었다. 절망의 순간에도 그가 한 일은 포기가 아니라 치열한 관찰과 기록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사실보다 익숙한 이야기를 더 오래 믿는다. 한번 굳어진 이미지는 새로운 증거가 나와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고흐를 ‘광기에 사로잡힌 비극적 천재’로 기억하려는 대중의 열망이 어쩌면 이 그림을 한 편의 유서로 박제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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