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울림과 홍대 골목 '두 개의 칫솔'[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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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2025.09.19 00:20 수정2025.09.19 00:20

두 개의 칫솔

고두현

봄 햇살 따뜻한
욕실 창에 기대어
부드러운 솜털
서로 간질이며
까르륵까르륵
웃음꽃 피워 올리는
새내기 커플 한 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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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과 홍대 골목 ‘두 개의 칫솔’[고두현의 아침 시편]

그룹 산울림 멤버 김창훈이 우리 시 1000편에 곡을 입히고 직접 노래했습니다. 그의 ‘시노래 1000곡’을 기념해 시인들이 자기 시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 쓴 에세이집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김창훈·맹문재 엮음, 이니티오 펴냄)를 김창훈과 함께 출간했습니다.

정현종, 신달자, 나태주, 정호승, 도종환, 고두현, 송종찬 등 23명의 시인이 시를 쓴 과정과 김창훈의 시노래로 재탄생한 것에 관한 소감을 밝혔습니다. 책 제목은 1000번째 노래인 이어령의 시 「정말 그럴 때가」를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저의 시 「두 개의 칫솔」에 곡을 붙일 줄은 몰랐는데, 짧은 시가 이렇게 노래로 불릴 수도 있구나 싶군요. 책에 실린 글을 원문 그대로 아래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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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가을이었다. 라디오만 틀면 <나 어떡해>가 흘러나왔다. 9월에 열린 제1회 MBC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작이었다. 서울대 농대팀 샌드페블즈가 불렀는데, 곡도 좋았고 4음절로 변주되는 가사도 좋았다.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 나 어떡해/ 너를 잃고 살아갈까/ 나 어떡해/ 너를 두고 떠나가면/ 그건 안 돼/ 정말 안 돼 가지 마라/ 누구 몰래 다짐했던 비밀이 있었나…” 하면서 서서히 고조되다가 “다정했던 네가/ 상냥했던 네가 그럴 수 있나” 하고 고음으로 치닫는 장면에서는 전율이 일었다. “나 어떡해”가 반복되는 후렴구에서는 더욱 그랬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사람은 ‘산울림’의 김창훈이었다. 그는 형 김창완, 동생 김창익과 함께 ‘무이(無異)’라는 밴드로 대학가요제 서울 예선을 1등으로 통과했지만, 형이 대학을 졸업한 상태여서 탈락하는 바람에 결선 곡으로 부르려고 준비했던 <나 어떡해>를 후배팀인 샌드페블즈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해 겨울, 이들 삼 형제가 밴드명을 ‘산울림’으로 바꾸고 1집 <아니 벌써>를 냈을 때도 그랬다. 라디오에서 이들의 노래가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동네 문방구에서 읍내 레코드 가게까지 하루 종일 울려 퍼졌다. 맑은 보컬과 통통 튀는 베이스 리듬에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 창문 밖이 환하게 밝았네” “아니 벌써 밤이 깊었나/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네” 같은 가사의 운율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보름 만에 40만 장이 팔렸다니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국산 싸구려 베이스 기타와 필리핀 밴드가 버리고 간 중고 기타, 드럼 대신 냄비 뚜껑이나 숟가락 통으로 연습하며 일군 기적이었다. 왕십리에서 계란판을 사와 흑석동 골목 집 방에다 붙여 놓고 미친 듯이 몰입한 결과여서 더욱 감동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수재’ 소리를 듣던 형 창완이 대학 때 기타를 잡은 것과 달리 둘째 창훈은 당산중학교 시절 성악가인 음악 선생님을 통해 클래식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그때 청음을 배운 뒤로 노래를 들으면 계명이 떠올랐고, 그 덕분에 머릿속의 멜로디를 음표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나도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 덕분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글을 계속 써 봐라”며 힘을 북돋워 주자 마음속에 용기가 솟아났다. 어느 날 글짓기대회에서 「남해 금산」이라는 시로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은 뒤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으니 당산중학교 시절의 그와 닮은 셈이다. 그러고 보니 시와 노래의 뿌리는 같다.

중3 때 산울림 2집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가 나왔는데 이 곡의 가사도 참 멋졌다. “그대는 아는가 이 마음/ 주단을 깔아놓은 내 마음/ 사뿐히 밟으며 와 주오” 같은 구절은 “금빛 은빛 무늬로 수놓은/ 하늘의 융단이/ 밤과 낮과 어스름의/ 푸르고 침침하고 검은 융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밑에 깔아드리련만”이라는 예이츠의 시를 떠올리게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중고 기타를 산울림 노래를 흉내 내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82년에 김창훈이 해태그룹에 들어가고, 김창익이 대우자동차에 입사했다. 그 뒤로 한동안 ‘산울림’ 활동이 뜸했다. 간간이 20주년과 30주년 기념 공연 등으로 기지개를 켜는 듯했다. 하지만 2008년 막내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 충격으로 ‘산울림’은 공식 활동을 접고 말았다.

그 무렵 나는 홍대 앞 산울림 소극장 인근에서 생활했다. 극단 ‘산울림’의 전용 극장 이름과 밴드 ‘산울림’의 이름이 같은 건 우연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우리말 중에서도 아주 웅숭깊은 공명음을 내는 ‘산’과 ‘울림’의 음조가 서로 중첩되어 오묘한 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 생각을 하며 홍대 정문에서 산울림 소극장 쪽으로 걷던 어느 봄날 오후, 한 골목 집 화단 위의 반투명 창문에 어슷하게 비친 칫솔 통을 발견했다. 가만히 보니 칫솔 두 개가 몸을 기댄 채 뽀뽀하듯 솔을 맞대고 있었다. 아마도 저 칫솔들의 주인은 풋풋한 새내기 커플일 거야….

그 순간 두 칫솔이 부드러운 솜털로 서로의 몸을 간질이는 장면이 떠올랐다. 곧이어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그 맑고 앙증스러운 이미지는 집에 돌아온 뒤에도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그 모습을 떠올리며 쓴 시가 「두 개의 칫솔」이다.

그런데 몇 년 전, 누가 “이거 들어봤어요?” 하며 시노래 영상을 보내왔다. 놀랍게도 산울림의 김창훈이 「두 개의 칫솔」에 곡을 붙여 직접 노래하는 영상이었다. 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풋풋하게 살릴 수도 있구나. 한마디로 ‘양념 적게 쓰고도 풋풋한 미각을 잘 살려내는 맛집’ 같은 느낌이었다.

봄날 오후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과 새내기 커플 한 쌍의 젊음, 이들의 푸르고 달콤한 시간과 까르륵거리며 웃음꽃 피우는 공간, 욕실 창가에 기댄 둘의 몸짓과 솜털처럼 부드러운 교감, 이들 새로운 날을 꿈꾸는 청춘의 사랑과 생명의 교집합…. 이런 요소들로 수채화 같은 인생의 봄날 풍경을 그리고 그 위에 향긋한 꽃잎 내음과 산뜻한 선율을 함께 입히다니!

하긴 김창훈 개인뿐만 아니라 ‘산울림’ 형제들이 일군 성공의 비결도 이 같은 맑음과 순수한 열정이었다. 곡을 만들 때 다른 건 생각하지 않고 오직 좋은 음악만 생각하는 순수함과 창작에 대한 열정, 그것이 이들의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원동력이었을 테니까. 그 맑고 순수한 소리의 음이 봄날 창가에 비친 두 칫솔의 정물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준 것이다. 마치 흑백영화의 정지화면 같은 창가의 그림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 ‘울림’의 바탕도 맑음과 순수 그 자체다.

이런 작업들이 ‘김창훈의 시노래’ 시리즈로 이어져 어느새 1000곡에 이르렀다니 놀랍고 존경스럽다. 중학교 때 <나 어떡해>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새롭고 또 멋지다.

산울림과 홍대 골목 ‘두 개의 칫솔’[고두현의 아침 시편]

■ 고두현 시인 : 1963년 경남 남해 출생.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이 있음.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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