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희미한 경계...경주에서 피어나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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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만큼 산 자와 망자 모두가 한데 섞여 흐르는 도시도 없을 것이다. 능을 보지 않고는 살기 힘든 곳. 능과 능을 뚫고 자란 고목은 둘 중 어느 쪽이 그 자리의 주인인지 모를 만큼 한데 뿌리를 내리고 있어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그 곁을 재잘대는 유치원생 무리가 지나간다. 10대 커플 또한 죽은 자들이 누운 자리 옆에서 입을 맞춘다. 이처럼 장률의 영화 <경주>는 생과 사가 공존하는 장소인 경주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단 하루간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영화 '경주'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경주'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여기, 막 귀국한 한 남자가 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는 대신 코에 대고 냄새만 깊이 들이마시는 그는 북경대학교에서 동북아정치학을 가르치는 젊은 교수다. 허나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멀끔하게 생긴 어딘지 수상한 한량처럼 보일 것이다. 이름은 최현(박해일 扮). 친한 형 창희(김학선 扮)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최현은 영정에 절을 하고 유족과 맞절을 한 뒤 고인과 셋이서 어울렸던 또 다른 형 춘원(곽자형 扮)과 같이 장례식장 밥을 먹는다.

<경주>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작되지만 그 죽음은 일상과 맞물려 무심히 흐르는 죽음이다. 최현은 술이나 하자는 춘원의 청을 거절하고, 7년 전 셋이서 함께 갔던 경주로 향한다. 그를 움직인 건 당시 한 찻집에서 다 같이 들여다보았던 춘화를 다시 보고 싶다는 막연한 충동이다. 그러나 찻집의 주인은 바뀌어 있고 춘화는 벽지로 덮여 더 이상 볼 수 없는 상태다. 찻집 '아리솔'의 새로운 주인 윤희(신민아 扮)는 춘화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는 최현을 경계한다. 윤희가 차를 준비하러 간 사이 최현은 춘화를 덮은 벽지를 들추어 그 너머를 들여다보려는 가망 없는 노력을 해본다. 시간으로 덮인, 혹은 시간에 의해 굳어버린 기억의 층위를 응시하려는 시도. 그 안의 것들은 흐르고 있을까? 아니면 그 시절 그대로 박제되어 있을까?

영화 '경주'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경주'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기억의 불완전성과 존재의 불안정함을 드러내기 위해, 인물과 현실을 구분하는 감각의 착시를 반복해서 만들어낸다. 최현은 7년 전 돌다리 아래에서 흐르던 물소리를 기억한다 주장하고, 관광안내소 여직원(정인선 扮)과 있을 땐 같이 천둥소리를 들었지만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다. 어제 만난 점집 노인은 사망한 지 몇 년은 지난 사람이고 지금 그 자리를 지키는 건 손녀라는 젊은 역술인(최배영 扮)이다. 실재와 비존재들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이 영화 곳곳에서 교차하며 나타난다. 유령적 감각과 대비되는 일상성, 친밀한 낯섦의 깊은 동요. 그 모든 언캐니(uncanny)함이 경주라는 도시 전체에 잔잔히 스며있다.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현실과 비현실은 포개지되 하나로 전이되지 않고, 양자 간의 성립되지 않는 관계는 영화 특유의 정동이 작동하는 조건이 된다. 그중 ‘흐름’은 영화 속 인물들의 움직임과 일상을 채우는 주된 감각이다. 불륜에 대한 흐르는 소문, 유령처럼 흐르듯 움직이는 창희의 처, 부드럽게 땅을 구르며 흘러가는 자전거와 찻주전자에서 찻잔으로 흘러들어가는 찻물, 유영하는 금붕어 꼬리, 소변 소리, 빗소리, 수평 이동하는 영화카메라의 달리 샷(dolly shot). 흐름 앞에서 존재와 기억은 무력하기에 최현은 이따금씩 휴대폰 카메라를 들고 순간을 붙잡아 고정하려 들지만 그 시도를 모든 이가 달가워하는 것은 아니다.

최현의 대학 후배이자 과거 하룻밤 상대였던 여정(윤진서 扮)은 그가 찍은 자신의 얼굴 영상을 지우며 내뱉듯이 말한다. “모든 것은 다 지워야 돼.” 기억의 고정성에 대한 환멸을 드러내는 동시에 여정 자신이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최현 역시도 자신이 피사체로 고정될 때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다. 그는 영화 내내 관찰자이자 기록자로서 행동해왔지, 제 국적이나 정체성을 고정된 좌표에 둔 채 해석되거나 발화하기를 꺼려왔기 때문이다. 최현은 이방인이자 유랑자이기에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고 끼어들 특권을 가진 듯이 보인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착시일 뿐이다. 자신이 속한 차원에 갇혀 다른 영역에는 가 닿지 못하는 상태, 이는 존재로서의 인간 모두가 공유하는 한계다.

영화 '경주'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경주'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예컨대 여정과 최현의 시간은 과거와 현재라는 다른 시간대에서 흐르고 있다. 여정은 임신중절이라는 과거의 사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하룻밤 기억에 기대어 여정을 불러낸 최현이야말로 과거에 고여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남편의 죽음을 떨쳐내지 못한 윤희는 망자의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산 자인 최현과는 다른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 하여 이 둘의 로맨스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윤희는 남편과 닮은 최현의 귀를 만져보지만, 그 접촉은 “만져보니까, 전혀 다르네요.”라는 결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실패한 접속이다. 닮았다는 기억과 다르다는 체감의 괴리에서 윤희는 망자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을 감추지 못한다. 능 위에 누운 채 안에다 대고 “들어가도 돼요?”라고 외치는 윤희야말로 불가능한 입장의 권한을 요구하는 인물, 죽음이라는 차원에 진입하지 못하고 삶에도 온전히 붙박이지 못하는 경계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윤희는 경주라는 장소에서만이 가능한 불가촉의 사이공간을 고요히, 동시에 있는 힘껏 대변한다. 윤희를 짝사랑하는 영민(김태훈 扮)과 영민을 짝사랑하는 다연(신소율 扮) 또한 감정의 비대칭적 흐름에서 만날 수 없는 관계인 건 마찬가지다.

영화 '경주'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경주'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오셨군요, 형수님.” 불현듯 정면을 응시해오는 최현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명암의 대비가 강조된다. 리버스 쇼트로 나타난 인물은 상복 차림인 창희의 아내다. 생령(生靈)으로 등장한 미망인과 최현의 만남은 현실의 인과로는 설명되지 않는, 영화를 통틀어 가장 불가해한 씬이다. 미망인의 생령은 최현과 마주본 채 창희의 죽음이 살해도 아니고 자살도 아니며 제 목숨을 스스로 다른 층위로 옮겨가기로 결심한 존재의 선택이라고 해명한다. 그에 최현은 “손 한 번만 보여달라”고 청한다. 여자의 손등 위로 최현이 손을 덮는 가벼운 접촉이 일어난다. 단절된 층위끼리의 중첩. 이들의 접촉은 일종의 유출(流出)이다.

카메라가 천천히 달리 샷으로 움직여 창희의 아내를 프레임 밖으로 빼낸다. 달리 샷은 <경주>에서는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을 카메라워크로 표현하는 방식이면서, 흐름의 미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기법이다. 카메라가 다시 한 번 최현을 원래의 프레임으로 복귀시키고 나면 생령은 사라져 있고 보이차를 가지고 온 윤희가 나타나 있다. 현실로의 복귀. 영화는 층위의 파열을 통해 인물 간 침투의 가능성을 잠시 열어두었다가 이내 다시 닫아버린다.

만날 수 없는 존재들끼리 닿아보려는 모든 시도는 완성되지 않거나 판타지에 그치고 만다. 흐름과 고정 사이의 불발과, 다른 층위끼리 오가며 접속할 수 있다는 낙관을 부인하는 물러남의 정서는 <경주>를 관통하는 관조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경주>는 접속이 실패한 자리에 남겨지는 잔여의 감각, 말하자면 층위 바깥의 진동이 일으키는 미세한 정동의 영화다. 서로 다른 존재의 결들이 나란히 흐르되 결코 하나로 섞이지는 않는 세계에서 인물들은 상대의 영역으로 건너갈 수 없다. 허나 그 실패에서야 비로소 감각되고 떠오르는 무언가는 분명 존재한다.

영화 '경주'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영화 '경주' 스틸컷 / 사진출처. 왓챠피디아

한편 인간은 기억을 거슬러 영영 망각되지 못할 위기, 혹은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흐름 사이에 끼어 제 유한함을 맞닥뜨리고야 마는 위태한 존재로도 제시된다. 후반부, 교통사고의 목격과 추적당한다는 위협이 최현을 엄습해온다. 실존의 위기가 그를 침투하자 급격하게 층위의 이탈과 혼란이 발생한다. 경계를 가로지르던 유유자적한 최현은 더 이상 없고 죽음의 가능성을 제 살결 아래로 느끼는 인간 최현만이 남아있다. 그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고 허겁지겁 걸음을 옮기며 뛰듯이 징검다리를 건너간다. 카메라는 망자가 아닌 산 자의 어지러운 걸음으로 최현을 뒤쫓지만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지는 못한다. 최현은 접촉 불가능한 대상처럼 멀리, 먼 데 고립된 채 등만을 보일 뿐이다.

다시, 아리솔. 윤희는 춘화가 있던 자리를 응시하는 중이다. 윤희와 최현은 춘화 속에 함께 들어갈 수도, 춘화를 같이 들여다 볼 수도 없었지만 지금, 부재하는 그는 윤희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기억의 지층에 퇴적된 존재가 되어 있다. 윤희는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리게 벽지로 손을 가져가 그 위를 가만가만 더듬는다. 다른 층위로 매장시켰던 것을 다시 지금 자신이 속한 층위로 불러내려는 시도다.

영화 '경주'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경주'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그들은 결국 상대의 자리로 건너갈 수 없었고 서로를 지나쳐 멀어졌지만, 접촉은 아주 잠깐이었고 감정이 흘러들기에는 너무도 짧았지만, 그렇더라도... 감각은 오래도록 손끝에 남는다, 찻잔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처럼. 각자의 결대로 흐르던 이들이 일으키고 간 파문에서 발생한 것은 어쩌면, 서로를 건드리는 아주 조용한 정(情)이었을지도 모른다.

찌이익. 찢기는 소리가 암전을 가른다. 그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은 기억일까, 균열일까. 아니면 어떤 무엇의 열림일까.

이태인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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