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기가 고밀도 에너지 저장을 위한 반도체 소자인 실리콘 커패시터를 미국 빅테크에 공급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20일 발표했다. 실리콘 커패시터는 인공지능(AI) 반도체의 필수 부품인 동시에 삼성전기가 신성장 동력으로 키우는 제품 중 하나다. 삼성전기가 이 제품을 고객사에 대규모로 공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전기는 실리콘 커패시터를 앞세워 AI 인프라 시장을 공략하는 데 속도를 내겠다는 계획이다.
삼성전기는 이날 글로벌 대형 기업과 1조5570억원 규모의 실리콘 커패시터 공급 계약을 맺었다고 공시했다. 시제품을 고객사에 공급하며 시장에 진출한 지 2년 만이다. 계약 기간은 내년 1월부터 2028년 12월 31일까지다. 주문 업체는 계약이 종료될 때까지 공개하지 않기로 했지만, 업계는 미국 빅테크일 것으로 보고 있다. 장덕현 삼성전기 사장은 “이번 계약은 삼성전기가 AI 시대의 핵심 부품 공급자로 입지를 다지는 중요한 이정표”라며 “앞으로 제품 라인업을 확대해 글로벌 고객사와의 협력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커패시터는 전기 에너지를 저장하고 방출하는 축전기 역할을 하는 반도체 소자다. 기존에는 세라믹과 금속을 여러 겹 쌓은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를 주로 썼다. 세라믹 대신 실리콘을 사용하면 발열과 전력 소비량을 줄일 수 있다. 실리콘 커패시터가 MLCC를 대체할 차세대 제품으로 꼽히는 이유다. 특히 AI 반도체에는 실리콘 커패시터가 더 유리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도체 패키지를 얇게 설계할 수 있는 데다 고성능 반도체 옆에 밀착할 수 있어 데이터 전송 속도와 안정성을 극대화하는 장점도 있다. 다만 MLCC에 비해 기술 난도가 높고 제조 비용이 비싸다는 게 단점으로 거론된다.
장 사장이 실리콘 커패시터를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고 한 건 이 때문이다. 그는 2022년 취임하면서 ‘신사업 태스크포스(TF)’를 설치하고 실리콘 커패시터 등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MLCC 중심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면서 차세대 먹거리로 주목받는 실리콘 커패시터 시장에서 점유율을 늘려나가겠다는 목표다. 장 사장은 지난해 “1∼2년 내 실리콘 커패시터로 1000억원 이상 매출을 낼 것”이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실리콘 커패시터 시장의 후발주자인 삼성전기는 초미세 공정 역량을 무기로 시장 점유율 확대를 꾀하고 있다. 실리콘 커패시터 시장은 기술 진입 장벽이 높고 고객사 인증 절차가 까다롭다. 이 때문에 일본 무라타, TDK 등 소수 기업이 시장을 장악해왔다. 삼성전기 관계자는 “주력 사업인 MLCC와 패키지 기판 사업에서 쌓은 기술 경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며 “그 결과 성과가 예상보다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미국 반도체 기업인 마벨테크놀로지에 실리콘 커패시터를 납품한 게 대표적인 예다. 삼성전자의 폴더블 스마트폰 ‘갤럭시 Z플립7’에도 삼성전기의 실리콘 커패시터가 쓰였다. 회사는 생산능력(캐파)도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 삼성전기에서 실리콘 커패시터 생산을 책임지는 컴포넌트사업부의 올 1분기 생산 설비 가동률은 95%다. 사실상 ‘풀가동’ 상태다. 최저점을 기록한 2023년(58%)을 기점으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AI 수요 등에 힘입어 시장도 꾸준히 커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모르도르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세계 커패시터 시장 규모는 올해 23억달러에서 2031년 32억4000만달러(약 4조8800억원)로 연평균 7%씩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기는 AI 서버 외에 자율주행시스템, 모바일 등 고성능 컴퓨팅 분야로 실리콘 커패시터 공급처를 다변화할 계획이다.
원종환 기자 won040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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