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지어진 서울 홍대 앞 H큐브는 1층에 애플스토어가 들어선 대형 빌딩이다. 3층부터 10층 사이에 병의원이 7개 있다. 모두 피부과다. 아픈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다. ‘피부 미용’ 때문이다. 요즘 한국에 불고 있는 ‘피부과 열풍’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권인중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리테일 임차자문 담당 이사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피부과가 성형외과를 제치고 가장 인기 있는 진료 과목으로 떠올랐다”며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 관광객까지 몰리면서 서울 홍대, 강남, 명동 상권이 피부 미용 중심지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메디컬 임대차 분야 전문가다. 8년 전부터 병의원 유치를 원하는 건물주와 개원을 원하는 의사를 상대해 왔다. 리테일 전반을 담당하다, 메디컬 분야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최근엔 메디컬 임차자문에 집중하고 있다. 작년 말 ‘메디컬 임차자문팀’도 따로 만들었다.
한때 ‘성형 수술’의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피부 시술’의 시대다. 권 이사는 “성형 수술은 번거롭고 수술과 회복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반면 피부 시술은 주사나 약, 레이저 등으로 비교적 간편하게 미용 효과를 낼 수 있다”며 “피부 시술을 받고 바로 관광을 즐길 수 있어 외국인 관광객도 요즘 피부 시술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병의원을 이용한 외국인 환자는 124만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약 70만명(56.6%)이 피부과를 찾았다. 2023년 23만여명(35.2%)보다 3배 가까이 증가했다. 성형외과를 방문한 외국인 환자는 지난해 약 14만명(11.4%)으로, 2023년 11만명보다 늘었지만 비중은 줄었다.
국내 환자도 늘어나는 추세다. 안티 에이징(항노화)에 관심 많은 중장년층, 남에게 보이는 모습도 자기 관리의 일종이라고 생각하는 청년층, 패션과 미용에 신경 쓰는 남성 그루밍족 등이 증가한 영향이다.
권 이사는 “상권도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역 일대는 원래 의료 쇼핑 중심지였지만, 홍대와 명동은 이와 거리가 멀었다. 한국에 놀러 온 외국인들이 피부과에서 미용 시술을 받는 일이 늘면서,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홍대와 명동이 병의원이 앞다퉈 들어서고 있다. 그는 “각국 언어에 능통한 상담원을 두고 외국인을 전문적으로 상대하는 피부과도 이들 지역에 생겨나고 있다”고 했다.
홍대와 명동에 대형 건물이 많아진 점도 의료 쇼핑 중심지가 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권 이사는 “병의원은 좁은 면적에 3개 층에 쓰는 것보다 한 개 층에 넓은 면적을 쓰는 것을 선호한다”며 “또 눈에 잘 띄는 대로변 건물이 병의원 유치에 유리하다”고 말했다.
요즘은 건물주도 병의원을 임차인으로 선호한다. 소비 위축이 계속되며 공실이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음식점이나 카페, 옷 가게 등은 금방 망하기도 하고, 이들 업종으로 대형 건물을 채우기는 어렵다. 그는 “메디컬로 건물을 채워달라는 의뢰가 많이 온다”며 “병의원은 임대료 수준이 높고 관리도 쉬운 편”이라고 말했다.
건물 저층부에 있어야 손님이 들어오는 다른 업종과 달리 상층부에 있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점도 병의원의 장점이다. 명동 하이드 파크 빌등도 1층엔 애플 스토어가 있지만 3층부터 8층까지는 다 병원이다. 지하철 신사역 근처 SR 5-4도 상층부까지 병의원으로 채워진 건물이다.
권 이사는 “피부과가 많이 늘었지만 시장 포화와는 거리가 멀다”며 “강남역 일대에선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환자가 몰리면서 오히려 공간을 더 확장하려는 수요가 많다”고 전했다. 외국인 환자가 더 늘어날 여지가 많은 가운데, 중국인 관광객 유입 효과가 본격화하지 않은 점도 성장 가능성을 높게 보는 이유다. 지난해 국내 병의원을 찾은 외국인 환자는 일본(약 44만명), 중국(26만명), 미국(10만명) 순으로 많았다.
핵심은 여전히 강남역 일대다. 그는 “강남역에 점포를 두고 있어야 고객에게 인정을 받는 분위기”라며 “지방에 지점이 10개 있어도 강남역, 홍대, 명동 같은 핵심지에 병원이 없으면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프랜차이즈 피부과들도 강남역에서 시작한 병원이라고 홍보하고, 기도나 지방에 사는 사람도 강남역까지 와서 시술을 받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경쟁이 치열한 강남역은 가장 앞선 기술과 장비를 갖췄을 거란 인식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는 지역 병의원의 매출 수준, 유동 인구, 상권 특성 등을 개원을 원하는 의사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임대인과의 협상, 용도 변경 등도 대행해 준다. 권 이사는 “원장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빨리 개원해 진료에 집중하는 것”이라며 “그 외 부분에 신경 쓰는 것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말했다. 일본에 진출하는 한국 병의원이 늘면서 이를 돕는 일도 하고 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